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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를 읽고.


나는 철학도 신학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감히 소설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주로 이성에 의지하여 문자로 번역해내는 작업이 철학과 신학이라면, 그 문자들이 가지는 본질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이성뿐만이 아닌 오감이 살아 숨 쉬는 삶이라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콘텍스트에 그것들을 오롯이 녹여내어 우리가 보다 깊고 풍성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이 어렵사리 번역해낸 텍스트가 더 이상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설명이나 물음의 목소리가 아닌 총천연색의 삶이라는 옷을 입음과 동시에 곧장 가려져버려, 텍스트에 의해 소외되었던 원래 ‘무’의 신비까지 되살려내는 작업이 나는 소설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텍스트로 환원되었다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 비환원화되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인 경험이 때론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공명시켜, 어떻게 소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와 독자 사이에 신비로운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소설은 단지 ‘허구’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경박함을 거뜬히 뛰어넘어 어느새 삶의 본질까지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는 소설의 힘이자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다.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글들이 필요 이상으로 근사한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른다. 텍스트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글은 점점 패스트푸드처럼 인스턴트한 짧고 쉽고 빠른 메시지로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 가버린다면 사람들의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갈수록 퇴화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점점 휘발성이 강해져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때론 안 읽는 게 더 유익할 때도 많다. 중언부언과 동어반복은 기본인 데다, 진부하고 뻔한 말들을 어찌 그리 현란한 수사로 치장해대는지, 아무리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 해도, 마치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요즘은 넘쳐나는 글들 가운데 정작 읽을 만한 글이 별로 없어 나는 종종 읽기 자체가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나는 홍수를 원하지 않고 마실 물을 원하며, 공해를 원하지 않고 깨끗한 공기를 원한다. 글은 양보단 질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 있다면 적어도 그 글을 혹시라도 읽을 사람들을 조금만 더 배려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문 같은 글이 어떤 면에선 가장 쉬울지도 모른다. 생각이 깊고 풍성한 토론이 오간 뒤라면 탄탄한 논리에 의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쓰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논문을 쓰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논문 쓰는 일이 실제론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소설이라는 분야의 창의성에 비한다면 금세 할 말을 잃고야 만다.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실들을 논리 정연하게 쓰는 일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텍스트에 담되 주관성과 보편성의 옷을 입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사실 비교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의 영역보다 나는 문학의 영역에 더 깊고 풍성한 진리가 녹아있다고 믿으며, 에세이나 논문 스타일의 글보다 소설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워야 하는 글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설을 한 편 써야지 하는 마음이 늘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은 물론 시공간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적인 권한을 스스로 거머쥔 채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글쓰기인 소설. 나는 이 형식을 빌려 언젠간 나의 사상과 신앙을 비롯하여 모든 사유와 감상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쓰게 될 날을 꿈꾼다.


시 같은 소설,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 같은 소설, 내겐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달에 울다’를 쓴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이 책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는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저자가 미래의 소설가에게 하는 당부가 오롯이 담겨 있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치밀하면서도 꽤나 강한 어투로 풀어놓은 책이다. 


앞부분만 읽어도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마루야마 겐지의 철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흡이 빠르진 않아도 다분히 꼿꼿한 그의 자세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소파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앉거나 누운 채 편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왠지 정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고, 왠지 가벼운 운동복이 아닌 정장을 차려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글쓰기의 무사 같은 이미지의 마루야마 겐지는 적어도 내겐 그런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미래의 소설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그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나를 환기시켜줬고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소설과 소설가의 정체성에 대한 마음까지도 가다듬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가 바라는 소설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자질은 ‘자립’이다. 그는 소설가는 금전적인 문제로부터, 성공과 인정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그 이외에도 자립을 방해하는 것들이면 무엇이나 다, 심지어는 도시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소설가란 백사장 근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얕은 바닷가가 아닌 망망대해의 깊은 물 위에서 홀로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무사처럼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지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모습으로, 글쓰기로 인해 파생되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글쓰기의 본질과 문학의 정수를 향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끝까지 정진하라고 요구한다. 


조금은 강한 어조와 단정적인 말투 때문에 이 책을 읽다가 도중에 내려놓는 독자들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가진 신비하고도 강력한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즉 진정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정면으로 맞서서 소설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어느 분야든 깊은 우물까지 파내려 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준비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 쓰는 일을 그저 돈벌이나 second job처럼 경히 여기면서 소설을 통해 문학이 아닌 결국 자신의 은밀한 사적 욕망이나 채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저자가 한창이던 시대보다 이 시대는 훨씬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기도 했고, 우린 전문가라는 단어조차 무색해지는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저자의 바람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통해 소설가와 무사의 이미지를 조용히 마음속에서 연결시켜본다. 조금 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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