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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길들여짐에 대해서.

프랑수아즈 사강 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 

잘못 각인된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상징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 연애, 치정, 혹은 불륜 소설 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만 보고 절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소설’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법한 이 작품은 ‘브람스’라는 단어로 인한 우리의 즉각적인 인상과는 무관한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가 암묵적으로 지니는 천박한 이미지로 이 소설을 폄하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싸구려 삼류 연애 소설에서 흔히 다뤄지는 자극적인 남녀관계를 부각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통속적인 삼각관계를 통해 인간 심리와 사랑의 속성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섬세한 통찰을 선보인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통속적인 것에서 심오한 것을, 평범한 일상에서 진리의 조각을 찾아내어 세밀한 관찰과 깊은 통찰을 선보이는 작품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언제나 옳다.

한 달 전 즈음에 읽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여러 장면이 겹쳐졌다. 안나는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온 브론스키를 선택한다. 남편도 아들도 뒤로 한 채 자신보다 한참 젊은 남자 브론스키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안나는 자살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비슷한 삼각구도가 등장한다. 안나의 자리에는 ‘폴’이라는 나이 서른아홉의 이혼을 한 번 경험한 인물이,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자리에는 ‘로제’라는 사십 대 중년 미혼 남성이, 그리고 브론스키 자리에는 ‘시몽’이라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청년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는 달리 폴과 로제는 부부가 아니다. 동거하는 연인일 뿐이다. 그런데 시몽은 브론스키와 사뭇 닮았다. 폴보다 현저하게 적은 나이의 남성으로서,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거침없이 접근했던 것처럼 시몽은 폴에게 접근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이 다르다. 안나는 초지일관 브론스키를 선택했지만, 폴은 마지막에 시몽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습관처럼, 혹은 그녀의 일상에 이미 각인되어버린 로제에게로 돌아간다. 위기를 지나고 나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로제에게로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폴은 다시 그 진절머리 나는 굴레 속으로 자진해서 갇히기로 한다. 안나는 죽음으로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마무리지었지만, 폴은 시몽과의 관계를 불장난이라고 결론을 낸 듯 로제에게로 회귀함으로써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폴의 선택 또한 어떤 면에서는 ‘죽음’과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몽 때문에 폴이 흔들렸다는 사실로 인해 위기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 폴을 대할 때, 마치 그동안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마치 잠시 잃어버린 소유물을 되찾은 것처럼,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성이 없는, 폴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로제의 옛 버릇이 어김없이 반복되는 시공간, 로제가 주인 행세를 하고 폴은 그저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그의 외도도 받아줘야 하는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안나와는 달리 비록 숨은 쉬고 있지만, 그녀의 영혼은 다시 노예를 자처한 것처럼 보였고, 그건 곧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폴의 선택은 현명했을까 하고 나는 묻는다.

로제와 시몽의 대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다음과 같다. 명문이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시몽이 폴에게 해준 이야기 속에서 나온 말이다. 

|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 (민음사, 43-44 페이지 발췌)

정말 무시무시한 선고이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사형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리고 이 명문은 폴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로제였다는 점에서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죄를 짓고 사형 대신 결국 고독 형을 선고받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스스로를 사형시켰지만, 폴은 고독 형을 선고받고 족쇄를 찬 영혼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폴의 마지막 선택과는 달리 시몽으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잠시 행복했다. 시몽은 그녀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존재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장면은 이 작품의 제목이 등장하는 문장이다. 뜬금없이 시몽이 폴에게 브람스를 연주하는 공연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장면이다. 다음과 같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 (민음사, 57 페이지 발췌)

이 부분은 폴이 자아를 잃어버린 채로 로제와의 관계에 길들여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정체성은 그녀 자신, 즉 ‘나’가 아니라, 로제와 그녀, 즉 ‘우리’였던 셈이다. 말이 좋아 ‘우리’이지 주인과 노예 구도가 습관이 되어버린 ‘우리’가 과연 ‘우리’일까? 하는 질문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계된 폴의 심정이 묘사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 (민음사, 139페이지 발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 (민음사, 150페이지 발췌)

로제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를테면 자유와 책임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아무래도 나는 폴의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 관념과 경험의 괴리랄까, 아니면 객관과 주관의 괴리랄까. 나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상과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길들여지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에 안착하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 사이에서 어느 쪽 입장으로 폴의 행동을 해석해야 할지 망설인다. 그리고 내 생각은 우리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는 인간관계까지 확장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것의 해소 방법에 대해서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뾰족한 법칙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답답함과 찝찝함을 동시에 느낀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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