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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평화.

애덤 윈 저,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를 읽고.
(책의 부제: ‘신약학자가 복원해 낸 메시아 예수 죽음의 비밀’)

모든 게 완벽했다. 언제나처럼 흠 없는 희생제물들은 죽임을 당했고, 성전과 제사장들은 맡은 바 일에 충실했으며, 백성들은 모처럼 만난 가족, 친지들과 회포를 풀며 함께 먹고 마셨다. 전날 밤부터 그날 아침까지 속전속결로 치러졌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만 제외하면, 로마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그해 유월절 행사는 순조롭기만 했다. 모든 게 정상이었고, 모든 게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건 흔히들 ‘거짓 평화’라고 부르는 ‘팍스 로마나’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유대인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한국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박멸하려고 애썼던 것과는 달리, 로마는 유대교를 비롯한 유대인 고유의 문화를 그대로 살려두었고 필요에 따라 존중까지 해주었다. 자칫 일어날 수도 있는 반란을 최소화하여 지배의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해서였다. 피지배인들에게 적절한 자유와 권력 부여하기, 우두머리 격인 대제사장 측근들을 돈과 명예로 구워삶아 앞잡이로 활용하기. 바로 로마가 유대인을 다스리기 위해 선택한 교활한 방법이었다. 덕분에 지배국인 로마의 실제 모습은 서민 유대인들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로마는 유혈 폭력이 기반된 압제적인 지배 방식의 허와 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게도 그들의 방법은 아주 유효했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참혹한 관계마저도 충분히 평화롭게 보이게 할 만큼 그들의 방법은 성공적이었다. 실제 현실에서도 무력 충돌이 줄었고, 치안이 확립되었으며, 상업이 융성하기까지 했다. 지배인과 피지배인 사이의 암묵적인 충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0년 이상 지속된 ‘팍스 로마나’의 겉모습은 가히 ‘평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평화’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평화의 참 의미에 대해서 나는 계속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평화였던 것일까. 지배국과 피지배국 간의 평화를 과연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지배자들에 의해 가공된 평화, 그 이면에는 로마와 대제사장 간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밀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부분적 배신은 물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양심과의 타협도 필연적이었다. 모두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라는 단어가 이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연결고리였다. 팍스 로마나는 철저히 계획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 체계와 깊숙이 감춰둔 잔인한 폭력에 기반하여 조작된, 거짓 평화였다. 월터 윙크가 간파했던 '구원하는 (구속적) 폭력', 즉 남을 희생양 삼아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형태의 대표적 예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 주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팔아넘겼다고 알려진 제자 유다도 주인공이 아니다. 예수를 실제로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 그러니까 대제사장 가야바를 포함한 제사장 무리와 로마 총독 빌라도, 그리고 배신자 유다의 존재를 비밀리에 제사장들에게 알려주고 실제로 연결시켜준 갈렙이라는 밀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원제 ‘Killing a Messiah’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메시아’는 주어가 아닌 목적어다. 문장에서 사라진 주어, 즉 예수를 죽인 자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다시금 문제 삼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대신, 허구에 기반한 작가의 상상력은 성경으로부터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혹은 경히 다뤄졌던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생각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면에 있었던 콘텍스트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 저자는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있었을법한 그 시대 정치판을 조명한다. 이 소설에 따르면 예수를 죽인 자는 ‘유대인’이라는 집합 명사도, ‘유다’라는 배신자도, ‘로마’라는 제국도 아니다. 예수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팍스 로마나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라고 판단되었던 예수는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이 세운 거짓 평화는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복음서를 기반으로 했을 때 실제 역사성을 가지는 몇몇 인물들의 이름과 직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만들어냈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을 주로 다루는데,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인물들은 오히려 예수의 인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빌라도, 가야바와 안나스와 엘르아살, 갈렙은 어떻게 예수의 죽음이 공모되고 계획되고 실행되는지 그 정치적 맥락을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팍스 로마나와 자신의 입지 유지를 목적으로 가졌던 빌라도, 자기 진영의 제사장이 다시 대제사장이 되도록 호시탐탐 현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는 전 대제사장 안나스, 유대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 목적으로 희석하고 합리화하여 팍스 로마나에 가장 큰 공을 기울이고 있는 가야바, 차기 대제사장을 노리며 예수의 체포와 처형에 적극적으로 나선 가야바의 아들 엘르아살, 평범한 유대인 장사치이지만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밀정이 되기로 작정하고 예수의 체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 갈렙. 이들을 각각 로마, 유대인 집권세력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유대인 서민을 대표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면, 예수의 죽음은 결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잘못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두가 연루되었던 것이다.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이 작품을 읽는 현재 우리에게까지 유효할지도 모른다. 

참 평화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세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적 악이 사라진 세상. 이리와 양이 함께 먹고 뛰노는 세상. 혐오와 차별과 배제가 증발된 세상. 사탄의 체제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은 비폭력이 기반된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겉으로는 거짓 평화인 팍스 로마나에 의해 묻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린 그 이후의 일을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과 그 외 문서들, 그리고 여러 증인들의 삶과 증언에 의해서 알고 있다. 예수는 부활하셨고, 로마는 멸망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책을 덮고 다시 한번 평화를 갈망한다.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북오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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