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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계성 뒤에 숨은 인간의 이기성,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다움

존 스타인벡 저, ‘분노의 포도’를 읽고

독서란 일차적으로 유희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유희가 목적인 독서는 그것이 닿을 수 있는 깊이의 반의 반도 이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 가능성이 크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충분히 즐기면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미만이 아닌 깊이와 풍성함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나는 가끔 독서에도 비장한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이때 독서는 단순한 ‘읽기’가 아닌 ‘이겨내기’의 의미를 띠고, 책은 ‘노는 장난감’이 아닌 ‘극복할 대상’이 된다.

언젠가부터 휴가를 맞이할 때면 평소엔 엄두를 못 내던 장편소설을 손에 든다. 이른바 ‘벽돌 깨기’다. 처음엔 백 퍼센트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 벽돌들을 깰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반은 부채감, 반은 의무감에 찬 비장하고 전투적인 마음이었다. 그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소파 위에 올라타 기지개나 켜고 있는 고양이가 아닌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든 용사가 되어야만 했다.

몇 년 전 헤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로 시작했던 이 단기 전투는 해를 거듭하며 나의 즐거움이 되었고, 이젠 다음 휴가 땐 무슨 작품과 함께 할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이 전투의 상대는 알고 보니 벽돌 책이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성장했고, 그 대가로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독서의 깊이와 풍성함을 맛보았으며, 그것을 더욱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일주일 채 안 되는 짧은 휴가 동안 읽었던 작품은 민음사 판본으로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 권으로 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였다. 유럽 고전 문학에 심취하여 그 깊은 우물 안의 물을 길어 먹던 나는 미국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과 같았다. 최근 몇 작품들을 읽으며 유럽 문학과 비교되는 미국 문학만의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의 독서는 지경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 11년째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일까. 미국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무언가 공감되는 면이 크다. 부분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합법/불합법적으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차별 문제와 그 배후에 있는 견고한 자본주의의 힘을 나도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작품 ‘생쥐와 인간’을 몇 달 전에 읽었던 탓인지 ‘분노의 포도’는 도입부부터 분위기가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숙하게 다가왔다. ‘생쥐와 인간’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보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이 작품에도 투영되었다. 그 이미지는 궁핍과 허무였다. 알고 보니 두 작품 모두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대에 써졌고, ‘분노의 포도’는 ‘생쥐와 인간’ 출간 후 2년 뒤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바닥을 뚫고 들어가면 정신적인 그 무엇에 닿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풍족할 땐 생각조차 못하던 어떤 것의 ‘의미’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인생/인간 저 깊숙한 부분에 관련된 것들을 궁핍에 처할 때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의미를 묻고 그 이면을 궁금해하는 자는 언제나 그 무엇에 굶주린 사람이다. 배부른 돼지는 묻지 않는다. 필요 이상을 가진 자들의 유일한 걱정은 ‘어떡하면 뺏기지 않을까?’ 일뿐이다. 그들은 그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악마화 시키고 차별, 배제, 혐오의 대상으로 둔갑시킨 뒤 공론화한다. 수십수백 명의 가난한 자들이 여러 날동안 먹고살 수 있는 돈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들은 그들을 ‘합법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합리적’인 폭력의 현장이다.

배부르고 영악한 돼지들은 이런 비가시적 폭력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부랑자로 내몰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해충 쓸어내듯 눈앞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말이다.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나름대로의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배후에서 유혈사태를 조장하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이 봐도 불법적일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덫과 같은 잔인한 계획이 성공할 때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다렸다는 듯 가시적인 폭력을 맘 놓고 휘두르고 그들의 운명을 심판한 뒤 생사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마치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게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다. 필요 이상 가진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아직 뺏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미리 가난한 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고 응징한다는 이 모순 가득한 비극. 나는 이런 일련의 순서로 진행되는 비극적 과정을 이 작품 ‘분노의 포도’에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며 다시 한번 그것이 가진 잔인한 기계성에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사라진 이기성,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인간 본성에 이르는 답 없는 질문에 쌓인 채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행과 트랙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오클라호마에서 몇 대째 삶의 터전을 잡고 착실하게 살아가던 톰 조드 가족 일행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집도 땅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부랑자 신세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간신히 구한 고물 트럭에 생필품만을 싣고서 서부 캘리포니아를 향한 먼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과일이나 목화를 따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희망에 찬 채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어렵사리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오는 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했다), 톰 조드 일행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이처럼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은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단지에 적힌 수백 명의 일꾼을 구한다는 광고가 새빨간 거짓은 아니었지만, 수요에 비해 과공급된 (너무나 과잉 공급된) 동부로부터 몰려온 부랑자 신세의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수를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땅에서 성실하게 땀 흘려 농사를 짓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벌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던 시대에 속했던 톰 조드 일행에겐 너무나 갑작스럽고 가혹한 전환이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이나 지주들의 입장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계산법이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 남짓된 지금의 시점으로 (이 작품이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 보면 당연한 논리로 보일 수 있고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별로 없는 계산법이었다. 예를 들어, 100명에게 시간당 1달러를 주며 일을 시킬 수 있는데, 예상외로 500명의 일꾼이 몰려들게 되면 그들에게 시간당 20센트만 주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100달러라는 동일한 금액의 돈이 들면서도 몇 배나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농장 주인 입장에선 더 많은 일꾼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을 500명의 일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하루 먹고살 수 있는 최소 금액이 시간당 50 센트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시간당 20센트의 돈은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금액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대두되는, 어떤 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인 것이다.

저자 존 스타인벡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렇게 작품 속에서 톰 조드 일행의 서부로의 반강제적 이동, 캘리포니아 입성, 노동력의 착취와 차별과 혐오의 현장을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비록 어떤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고 조금은 낭만적으로 그려놓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게 바로 소설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한다.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의 이면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힘. 문학의 힘.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충분히 생각에 잠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는 톰 조드 일행의 관점으로, 다른 하나는 그들을 착취하는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의 관점으로. 물론 이 작품 속엔 톰 조드 일행과 같은 목적으로 캘리포니아로 이동한 수십 만의 이주민들이 등장한다. 요즘 말로 하면 모두 홈리스들인 셈이다. 그들은 천막을 짓고 물이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있어 그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즉, 같은 부랑자 신세가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 역시 저자는 놓치지 않고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하여 그려놓는다. 그렇다면 첫 번째 관점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장 주인들을 향한 눈, 다른 하나는 같은 동지들을 향한 눈.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작품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이런 관점들만 나열해놓고 봐도 이 작품은 시대와 문화는 우리와 달라도 똑같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우린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참고로, 톰 조드 일행에겐 자기만 살려고 하는 부랑자들과도, 그들을 착취하며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된 농장 주인이나 그들과 상부상조하며 캘리포니아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을 배제하는 정부 관련 인간들과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다움이었다. 그들은 배고파도 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등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상치되는 곳에 저자는 ‘인간다움의 존속’을 놓아두며, 그것이 희망의 씨앗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와 인간다움의 대립.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전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기계성과 그것을 무기로 삼고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것들에 저항하여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인간다움의 정신. 문학이 아니면 꿈꿀 수도 없는 이 기막힌 장면들의 묘사.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을 다시 쳐다볼 수 있고 그 이면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느 고전 문학처럼 개별적인 상황을 그리고는 있지만 개별성을 넘어 인간과 인생의 보편성에 이르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인 존 스타인벡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에 현격한 공을 세웠던 작품이기도 한 이 책 ‘분노의 포도’를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한다. 아무 죄 없이 차별당하는 굶주린 톰 조드 일행의 눈에 비친 잘 익은 캘리포니아 포도가 ‘분노의 포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공감하며 나는 안타까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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