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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7. 2. 01:04

 

**이 글은 감상문이 아닙니다. 책을 1/3 가량 읽고 묵상하다가 끄적거린 글입니다.**

신앙의 여정: 사귐이 있는가?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몇 달이나 꽂혀 있었을까. 며칠 전, 새롭게 읽을 책을 하나 고르려고 뻔한 내 책장을 찬찬히 훑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눈은 김영봉 목사의 ‘사귐의 기도’에서 멈췄다. 예전에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이후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던 책이었다. 항상 다른 책에 우선순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나로선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던 경험이라, 책을 꺼내어 앞부분을 들춰보다가 순식간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잠시 책을 덮고 조용히 묵상하며 나의 내면세계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되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었을 무렵, 고질적으로 영과 육을 나누는, 공식화된 이분법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의 책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사적인 복음의 충만함이 결코 공적인 복음으로 자연스레 넘쳐 흐른다거나, 누적포인트 전환하듯 바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신앙의 본질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개인 영성'을 위한 책들과는 부지 중에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책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가진 복음이 오로지 개인적인 경건함과 성숙함만을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함몰되어, 내가 아닌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타자들을 돌아보는 눈을 다시 잃게 될까 두려웠고, 개인 간의 거짓과 위선이 아닌 구조적인 불의와 악습 같은 것들로부터 저항하는 마음 보다는 그저 참고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듯한 삶을 또 다시 맹목적으로 살아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24시간 예수 바라보기로 대표되는 개인 영성을 강조하다 보면, 희생자의 희생과 견뎌낸 자의 수고함을 치하하고 박수를 보내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희생하고 견뎌내는 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와 응원도 아끼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진 너무나 좋다. 그러나 그러한 불필요한 희생과 견딤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놓치기 쉽다는 점이 간과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체제로 발현하는 사탄의 모습을 대적하기는 커녕 용인해주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에 국한되어야 할뿐, 가시적인 체제로 드러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한 신앙은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적극적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자체를 불경하게 여긴다거나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여기는 경향까지도 갖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개인은 피해자나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어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시스템, 즉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인 부조리를 인정하고 합리화시켜 버리는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낸다 (비록 뜻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오로지 개인의 평안을 더 도모하고 의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서, 어쨌거나 그 역경을 견뎌내도록 개인을 유도한다. 또한, 세상은 장망성이기 때문에 그저 그런 시련 속에서 꾸준히 경건함과 성숙함을 도모하여 죽기까지 지속할 것을 가장 큰 사명이자 신앙의 유일한 지향점이라고 판단하도록 간접적으로 조장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렇게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구조를 인정하고 아무런 저항이나 참여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영적 상태만을 돌보는 행위가 과연 신앙인의 참된 모습일까?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거나 저항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참고 견대내면서도 묵묵히 바보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과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일까? 과연 그 모습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고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일까?

머리가 커지면서 여전히 개인 경건과 성숙에 함몰되어 있는 목사들의 설교를 언젠가부터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교만한 자로 낙인 찍고 속으로는 온갖 정죄를 단행하면서도, 겉으론 마치 사려 깊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곤 했다.

유전자의 기능을 생체 내에서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특정한 유전자를 제거해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물처럼 공기처럼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보면 그 공간이 가진 편협함과 가식과 위선으로 오염된 모습과 더불어 조금은 더 객관적인 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안에서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공급받으며 살아갈 땐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순수함은 배타적인 분리의 칼이 되었고, 그들의 열심은 더 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게 막는 눈가리개가 되어주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 칼과 눈가리개로 훌륭하게 무장한 인간이 사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왔던 주된 세력의 실체 아닌가. 어쩌면 개독교라는 말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담당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즉 개인 영성으로의 치우침은 초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하나님나라의 모습과는 (믿지 않는 자들이 봐도 충분히 알 만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개인 영성 훈련 관련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정치학적인 인간사회라는 현장과는 무관한, 마치 진공 속과도 같은 공간에서만 이뤄질 것 같은 가르침들을 계속 그런 책들을 통해 공급받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르침들과 내가 일상으로 살아내는 현실과의 간극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그 괴리감은 이내 내게 죄책감으로 작용했으며, 그 죄책감을 나는 또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부족해서 그렇구나.'라는 말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나의 몸부림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년법은 사적인 복음보다는 복음의 공공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난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법을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큰 두 기둥인 정의 (미슈파트)와 공의 (쩨다카)를 근간으로 하여,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헤세드)의 실현이 바로 희년법의 의미 아니었던가. 예수의 핵심 사상 역시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라고 나는 믿는다. 구약이 그저 배경이 되는 신약이 아닌, 구약을 전제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더 크고 풍성하며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말씀이 바로 성경 아닌가. 그렇다면, 어찌 24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언제나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한 법. 24시간, 아니 25시간 개인 영성을 훈련한다고 해서 희년법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법이 아름답게 표현된 실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복음의 공공성을 함께 모여 추구하는 것이 타당한 수순 아니겠는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진행되고, 다시 난 책을 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내 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공적 복음의 중요성을 외치는 것까진 좋지만,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바른가 하는 질문. 억압받는 타자에게 자유가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들이 바라는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든 성취가 되게 해주려고 도와주는 일이 과연 복음의 전부인가 하는 질문. 아무래도 사회정의 실현과 약자들을 돕는 일 쪽으로 알아가다 보면,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고, 해서 뭐하나 하는 체념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게 인생이려니 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되어간다. 예수는 서서히 증발되고 예수가 했을법한 행위들만 남아 복음을 실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억압된 자가 해방되고, 가난한 자가 구제 받는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땐 보람과 희열도 느끼지만, 그것 역시 여전히 억압받고 소외 당한 무수히 많은 약자들을 생각할 때면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그러면 감사와 기쁨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내 삶을 다 바쳐도 구제하지 못할 약자들의 부르짖음 소리에 눌리고 만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이 아닌 예수의 공생애 기간 때의 행적들을 좇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아내려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그 끝은 여느 인간 지혜자가 도달하는 최종결론처럼 '삶의 무의미함'이 되어버린다.

우익의 복음에 천착한 삶에서 염증을 느꼈지만, 좌익의 복음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몸부림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그 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을까. 예수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존재 자체가 나와 함께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하나님과의 사귐이 내게 있는가. 그것으로 나는 기뻐하는가. 감사해 하는가. 혹시 그것 없이 내가 참여하고 도운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함으로만 나의 훈장을 하나씩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썩어질 면류관을 난 사모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수의 사상과 행적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명분 하에 결국 내가 했던 건 예수를 증발시키고 나의 행위만을 남기는 짓을 하진 않았을까.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계된 모든 질문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거룩한 시간과 공간. 그래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웃을 향한 사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이 책을 가능한 천천히 읽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러한 질문으로 묵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좌우에 치우친 복음이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지만, 언제나 이런 점검을 하며 앞길을 내디딜 수 있기를.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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