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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웃을 때도 손을 가리며 웃던 그가 그날은 뻐드렁니가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과 몸 전체에서 나는 진심을 느꼈다. 참았던 눈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순간 모든 게 한꺼번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겐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나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받아들여진다는 느낌만큼 가슴 벅찬 일이 또 있을까. 거미줄 쳐진 마음의 빗장을 힘껏 열어젖히는 그 강력한 힘. 그건 진심 어린 공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감은 켜켜이 쌓여왔던 오해와 불신까지도 단번에 씻어내는 힘을 가진다.
사람이기에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 사람의 내면적인 것들이 많이 드러나는 얼굴과 몸짓을 볼 때면, 난 언제나 이성을 통과하지 않고 훌쩍 뛰어넘는 뭔가를 느낀다. 나는 이것을 '여백'이라고 부른다.
사람과의 관계가 표면적으로만 맺어지고 유지되는 까닭은 어쩌면 서로의 채워진 부분만을 소개한 뒤 그것만을 가지고 서로를 안다고 결론 내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다층적이다. 컨텍스트라는 빛이 다른 각도와 양으로 비칠 때마다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상대방이 일관성이 없다거나 예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대부분 그 사람과 만날 때마다 비슷한 각도와 양의 빛이 비춰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인 이상, 그리고 생각한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하물며 스스로도 일관적이지 않잖은가) 일관성을 바래왔다면, 그것이야말로 경솔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층적인 면을 가지는 인간은 동시에 여백을 가진다. 이 여백의 공간은 채워진 부분보다 훨씬 크다. 그것이 무의식으로 불리든, ‘무’라고 불리든, 신비라고 불리든 상관없이, 그 여백은 그 사람의 꾸미지 않은 모습이 모두 담겨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가끔 혼자 몰래 감동을 받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안 좋은 인상을 받는 것도 그 여백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여백. 사실 한 사람을 공감한다는 건 그 사람의 여백을 알아차리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드러내고 포장한 모습만으로 나를 허물없이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참 좋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때론 나도 모르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나의 여백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더 좋다. 그럴 때면 진정으로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사람과 무언가 통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아파하거나 위로를 바라는 누군가의 여백은 아마도 겉으로 드러난 좋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과 분석에 의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조차 함부로 행하여 인식론적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 있어서 문제가 되지만, 그런 인간 말종들을 제외한다면, 진정한 공감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인과관계에 종속된 문제해결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허나, 진정한 공감의 무게중심은 채워진 부분이 아닌 빈 공간, 즉 여백에 있다는 희미한 사실만을 눈치채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개별적인 컨텍스트에 따른 각자의 여백을 알아가고 공감하고 작은 위로나마 할 수 있도록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는 아주 작은 행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 여백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실천과정 중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신비가 아닐까 싶다. 나의 여백과 그 사람의 여백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 중에 만나게 되어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진정한 공감이나 위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