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그리고 빈 공간
여유, 그리고 빈 공간.
따스하게 내리는 기분 좋은 햇살, 적당히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습기처럼 우울한 기분도 말끔히 날려버릴 것만 같은 날씨다. 실내에서만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 바깥에 잠시만 나와도 금새 마음이 들뜬다.
조금은 더 긍정적이고 조금은 더 밝게 보고 생각해야겠다는 무언의 다짐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단지 햇살과 바람에 잠시 노출되었을 뿐인데. 강력한 힘이다. 나는 이성과 합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나, 감정과 무의식의 본능적인 메시지에도 자주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일개 범인이다.
캘리포니아 3년차가 되니 이제서야 왜 미국 동부와 중부에 사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에서 휴가를 보내거나 살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나의 나그네 여정 중 지금 현재의 공간좌표가 캘리포니아라는 사실에서 오늘 문득 감사함을 느낀다. 또 언제 떠날지도 모르지만, 잠시 정착한 이곳에서 평화를 갈망하며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삶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나그네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일 것이다.
마침 아이의 학교가 쉬는 날이라 하루 휴가를 냈다. 주말에 충분히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하고 느지막이 일어나 아들과 맛있는 아점을 먹으러 나갔었다. 오늘은 우리가 사는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만 쉬는 독특한 날이기에, 여느 휴일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모두 다 정상수업이나 정상근무를 하는데 나와 아들만 특별 휴가를 받아 그들을 밖에서 바라보며 유유히 여유를 즐기는 듯한 묘한 기분. 언젠가 학창 시절, 선생님 심부름으로 일과시간에 홀로 조용히 학교를 빠져나와 길을 걷던 그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어색함 가운데 느꼈던 자유. 마치 비밀스런 공간에 침투해버린 것만 같은 기분. 여유란 어쩌면 상대적이고 참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은 일하고 나는 놀고’ ㅋㅋㅋ
배불리 먹고 집에 돌아와 이삿짐 싸는 일을 거의 마무리했다. 이제 집 안에서 말하면 울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듣지 못했던 소리다. 채워지면 들리지 않는 이 소리. 그리고 집 안에 충만한 빈 공간. 내 삶도 적당히 채우며 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늘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누는 삶도 이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사진은 내가 사는 동네 도서관 가는 길. 이사 가면 이제 이 길은 자주 걷지 못하겠지.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도서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