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아닌 동료.
감독이 아닌 동료.
내가 사는 엘에이 근교에서도 인종에 상관없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대기에 흐르는 암묵적인 분위기는 조심스럽다. 여럿이 모여 자신이 갑작스레 처한 상황을 서로 이야기하고 맞장구치며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행위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일뿐, 심층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음이 느껴진다. 웃음이 잠시 입가에 걸리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그 동안 바이러스 따위는 전혀 무섭지 않다며 떵떵거리던 부류도 이젠 입을 다문다.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만을 피해갈 거라고 믿는 듯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객관적이고 도덕/윤리적이고 사회봉사적인 코멘트를 수시로 날리며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현자처럼 굴던 자칭 온라인 여론의 리더들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마트에서 생수와 화장지 대량 구입에 성공하곤 입가에 비밀스런 웃음을 짓는다. 재앙은 자신과 거리가 있을 때에만 교훈적인 메시지를 뽑아내거나 철학적 사유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정작 본인 스스로나 가족이 그 재앙을 당하게 되면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바뀐다. 이전에 본인이 뱉은, 더 이상 주워담을 수 없는, 그 수많은 호기로운 말들은 하나하나가 화살이 되어 본인에게 날아온다. 자칭 현자들이 수치를 당하는 때다. 아무리 지혜로운 말들이 많이 뿜어져나온 입이라 해도 그 입의 소유자는 역시 한낱 인간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의 한계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면서,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수많은 재앙의 영향권 아래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이미 물었어야 할 질문은 when이다. 저 높은 콘트롤 타워에서 비디오 게임이나 하는 듯한 경솔하고 드라이한 코멘트는 이제 그만. 자신의 입지를 높이거나 배를 채우는 목적 따위의 코멘트도 이제 그만. 확진자가 내가 될 수 있고, 내 가족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상황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행동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감독이 아닌 동료다. 이는 이웃이라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우리의 인간성을 시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