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함의 현장
거대함의 현장.
나는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을 반대하면서도 인종차별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피라미드 시스템에 폐해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을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폭력을 반대하면서도 그 폭력으로 인해 얻은 평화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 중 하나다.
흑인들에 대한 오래된 인종차별에는 울분을 토하고 깃발을 치켜들면서도 정작 이웃에 있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여전히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여전히 합법적인 불법으로 대하는 사람들. 차별 반대 시위에 나가면서도 월급날이면 여전히 자신이 왜 누구누구보다 더 많이 받아야 되는지 당위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차별의 혜택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들.
피라미드 시스템의 폐해를 막고자 피켓을 들지만 그 피켓을 들었던 시간과 행위에 대해 박수를 받는 사람들은 보통 피라미드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 있는, 소위 높은 사람들. 상관에게 불합리한 차별을 받아 분노하며 그 시스템을 반대하지만 여전히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자신이 대우 받는 것은 피라미드 시스템의 불의함 덕분이 아니라 자신이 획득한 처세술이라며, 그래서 자신의 성공은 자수성가라며 떠벌이는 사람들.
비폭력 시위를 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 혹은 남편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폭력적인 언사가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 강연하고 돌아와 집청소가 안 되어 있거나 따뜻한 밥이 준비되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
거대한 담론들, 거대한 관념들, 거대한 사랑에 도취되어 정작 자신의 개별적인 일상에선 경솔하고 게으르게 행동하는 사람들. 당신에겐 그런 거대함을 수호하는 게 일이었나? 돈벌이였나? 혹은 재미였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이 아니다. 일이 아닌 일상이 되어야 한다. 소소한 일상에 그 거대함이 깃들어 있음을 안다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소소한 일상에까지 침투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면, 중요한 것은 일상이다. 내가 사는 삶. 거대한 구호에 가려지고 희생되어선 안 된다. 거대함의 현장은 일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