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여유: 컨텍스트와 무관한 텍스트의 가치, 그 폭력성에 대하여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6. 18. 02:48

여유: 컨텍스트와 무관한 텍스트의 가치, 그 폭력성에 대하여.

“돈, 그거 중요하지 않아. 그게 삶의 목적이 되면 안 돼.”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이 말을 돈 많이 가진 사람이 할 때 우리의 반응은 두 가지다. 본능적으로 모순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돈을 초월한 자로 여기고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은 이상 돈에 초월한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상식적인 전제 하에 다시 생각해 볼 때, 두 번째의 반응을 보인 사람도 언젠간 결국 첫 번째 반응으로 전환하게 되리라는 건 명백하다. 돈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돈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즈음이면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리곤 이어서 상상해 볼 것이다. 만약 저 사람이 빈궁하게 된다면 과연 자신이 내뱉은 저 멋적은 말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 가득한 상상.

돈 뿐만이 아니다. 무엇을 가졌든 충분히 가진 자들이 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예전과는 달리 왠지 모를 거부반응이 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간절한 바람 혹은 목표일 수도 있는 그것을 먼저 가져놓고, 그리고 그것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으면서, 함부로 그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 설사 그것이 돈이나 명예와 권력 같은,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대놓고 취하면 파렴치한으로 몰릴 수 있는 부끄러운 가치들이라 해도, 가진 자가 가지지 않은 자 혹은 가지려고 몸부림치는 자에게 경솔하게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말을 던지게 된다면, 그 말의 텍스트는 틀렸다 할 수 없을지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무너뜨리고 상처를 주게 된다. 컨텍스트를 읽지 못한 채 쏟아낸 텍스트의 폭력성이다.

여유. 이 세상에 넘쳐나는 정의로운 말들은 어디서 누구에게서 쏟아져나온 것일까. 우리가 어떤 말을 듣거나 읽고 난 뒤 온맘 다해 공감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도 많은 경우 혹시 그 텍스트가 나온 컨텍스트의 선이해의 부재에서 기인된 건 아닐까. 그저 배불러 풍족한 나머지 기름이 번지르르한 입에서 나온 말들에 우리가 흥분했던 건 아닐까. 그 말의 가치판단을 넘어서 과연 그 말을 만들어낸 사람의 ‘여유’가 끼칠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곰곰히 생각해 볼 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