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익숙해짐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4. 8. 01:26

익숙해짐.

익숙해진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어리버리할 때의 불안함이 차라리 낫다고 여겨질 때도 많다. 변질의 시작, 장악, 압제, 횡포는 익숙해진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익숙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 바보가 더 행복할 수 있지만 행복하자고 바보이길 자처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알게 되고 익숙해지는 건 인간의 숙명이다. 그리고 그건 시간 문제일 뿐이다. 우린 어쨌거나 익숙해진다.

익숙해지기까지의 여정이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 가장 빛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진취적이며 열정과 노력과 성실함이 풍부하게 발휘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그렇게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여정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동물적인 생존본능을 넘어서는 그 무엇. 단순히 뛰어난 능력으로 살아남는 재주를 부릴 줄 안다는 게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나는 그건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동물과 비교하는 것 따위로 인간의 특징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자체가 인간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는 행위이며 인간의 본질을 망각하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남과 정착의 반복된 사이클. 어리버리와 익숙해짐의 끝없는 반복. 타성에 젖을 때가 언제인가. 무료함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 일상에 흩어진 찬란한 행복의 조각들을 더러워진 두 발로 짓밟은 채 무지개를 찾거나 허무와 공허를 실감할 때가 언제인가. 정착한 이후에, 익숙해진 이후에 성취감 혹은 만족감과 함께 불쑥 찾아오는 것들이 아닌가. 이때다. 나는 이때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 최고로 발휘될 수 있을 시기라고 생각한다. 정착했지만 안주하지 않는 것. 익숙해졌지만 어리버리할 때의 불안함을 잊지 않는 것. 언제나 적절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겸허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 언제나 길 위에 있음을 잊지 않는 것. 인간의 진정한 인간됨은 잠재된 능력을 100% 발휘하여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데에 있지 않다. 10%를 발휘하더라도, 무언가를 거대하게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의 사용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