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
장악.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고 느끼게 될 때는 그 안에 있을 때이기보다는 외도를 감행할 때인 것 같다. 이를테면, 일에 치여 월화수목금금금 하며 살 때보다 휴가를 떠날 수 있을 때, 그것도 예정에도 없던 시간에 하던 일을 멈추고 훌쩍 떠날 수 있을 때, 우린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무언가 자신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안팎을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힘인 것이다. 어딘가에 매여 있다면 결코 장악한 게 아니다. 장악이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일종의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내 삶을 조금도 장악하지 못한 것 같다. 아주 기본적인 잠자는 시간도, 먹는 음식도, 하물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내 뜻대로 하지 못한다. 언제나 신경 쓸 뭔가가 있고, 언제나 어떤 조건이 따라붙어서 나는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취하다 보면 남는 건 쓰디쓴 좌절밖에 없다.
그런데 문득 ‘나는 왜 장악하고 싶어 하는 걸까?’ 하는 질문 앞에 선다. 그랬더니 내 안에 심이 깊게 박힌 커다란 못을 하나 마주하게 된다. 몰랐던 존재다. 아니, 어쩌면 모르려고 했었던 건지도. 이런저런 고급스러운 표현을 다 제거하고 그 못의 실체를 까발려보기로 한다. 거기엔 다름 아닌 유아적 자아가 있다. 내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자라지도 않고 이제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든 내 안에서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지껄인다. 여태껏 들리지 않았던 소리다. 그 아이를 발견한 나와 아이가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이 들리지 않던 소리를 깨웠다. 하나가 둘이 되었다. 또 하나의 무의식이 의식의 영역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양파 껍질 같은 내면이 한 단계 더 파헤쳐진 순간이다.
아이가 떼쓰는 장면. 아이는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부모는 아이의 생떼 때문에 손발이 묶인다. 자유를 박탈당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 그런데 이런 상황을 두고 아무도 아이가 그 삶을 장악했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부모의 해석일 뿐이다. 아이가 생기기 전의 상황과 비교를 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한숨을 쉬는 소리다. 그러나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는 부모조차 그 삶을 아이가 장악했다고 여기진 않는다. 기본적인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는 부모에게 없어도 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아이와 부모의 삶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존재는 아이가 아닌 부모인 것이다. 장악은 자유와 항상 함께 가진 않는다.
어쩌면 장악이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생떼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될수록 제한거리가 많아지고 혼자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도 이를 뒷받침한다. 성숙해지면서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점점 사라지지만, 사실은 발을 땅 위에 디딘 삶을 점점 온전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 이게 진정한 장악의 의미가 아닐까. 손발이 묶인 것 같은 부자유, 내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자괴감, 탈출하고 싶은 욕망, 이런 것들은 삶을 진정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구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장악은 삶을 부둥켜안는다. 느리더라도 함께 간다. 점점 신이 아닌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