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긴개긴
도긴개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자하게 생긴 어르신들을 존경했다. 한 사람의 사상과 정서, 생각과 마음이 오랜 시간 축적되면 얼굴로 드러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자한 얼굴의 소유자는 내겐 곧 인자한 사람이었다.
그들을 닮고 싶었다. 인자한 웃음에서 묻어나는 여유, 그 여유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쫓기는 삶에 피곤해질 때면 언제나 그들이 먼저 떠올랐다. 딱히 그들이 무슨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냥 편했다. 그냥 내 얘기를 해도 될 것 같고, 바보 같지만 솔직한 내 모습을 그냥 무방비 상태로 보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내게 있어 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히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믿음이 생각의 우물에 갇히거나 행동 없는 말에 머물지 않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나름 노력해왔는데, 나의 그러한 달음박질 끝에는 언제나 말없이 그들이 서 있었다. 인자함은 내게 있어 곧 살아있는 믿음, 즉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가만히 돌이켜보면 꽤나 비이성적이고, 자칫 맹목적일지도 모르는 판단이었던 것 같다. 나이 마흔 중반, 별의별 독특한 사람들도 그동안 꽤나 많이 겪었다. 내가 사람의 본성이나 심리 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 행동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읽어나가는 모든 책은 크게 보면 다 이 주제를 향한다. 인간의 본성. 나는 그 본성이 얼굴에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고 믿은 데다 정작 내 모습은 인자함과는 동떨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주제를 파고들면 들수록 나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화살을 나의 과거로 돌리고 있었다. 프로이트 식의 해석은 언제나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독선, 독단적인 나의 어릴 적 모습이 여전히 내 얼굴에 살아있어 내 현재도 미래도 잠식시키고 있구나, 하며 남몰래 한숨 쉬며 통탄했던 숱한 밤도 스멀스멀 기억이 난다. 은밀한 죄책감이 진하게 배인 내적인 고민은 외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 비로소 만개하는 법이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무너졌었다.
그 이후 생각이 좀 달라졌다. 눈에 드러나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인자한 얼굴의 소유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갑을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진 경우엔 달라진다. 그들이 직접 관련된 문제라면 그들은 속내를 보이기 시작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을 만큼 겉과 속이 완전 다른 이들도 여럿 목격했다. 인자했던 그들의 속은 인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나의 실망감에 그치지 않고 나의 믿음과 나의 세계관까지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이성을 배제할 정도로 신뢰했던 사람이 어느 날 낯설게 느껴질 때, 내가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린 그 사람에 대한 실망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큰 실망을 하게 마련이다. 마지막 풀 한 포기마저 사라지는 기분. 허망함이랄까. 내가 믿고 따랐던, 그리고 내가 되고 싶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은 인자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그들의 위선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을 테다. 절반은 내가 그렇게 믿기로 작정하고 거기서 오는 유익과 더불어 적절한 채찍을 즐겼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의 인자함은 더 이상 내게 있어 막강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 인자한 얼굴, 그거 허상일 수 있다. 아무래도 사람은 도긴개긴인 것 같다.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인자한 얼굴의 소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인자하게 생겼던지 안 생겼던지에 상관없이 진짜 인자한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확률은 같다고 본다. 확률은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중엔 분명히 자신의 생김새 (그리 노력하지도 않고 저절로 갖게 된 자상하고 착한 얼굴)를 십분 활용하여 내가 가졌던 것과 같은 위험한 믿음의 소유자에게 암묵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들이 있음을 이젠 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해오던 방식대로 암묵적인 갑을 행세한다.
한 번 물렸던 경험이 있을 때 우린 반동적인 힘으로 한동안은 원점보다 좀 더 튕겨나가 반대쪽으로 치닫게 된다. 그 결과 인자하게 생긴 사람들만 보면 더 경계를 했던 적도 있었다. 인자함은 곧 위선이라는 등식이 어느샌가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수정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어느 정도 원점 가까이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사람은 너무 다양하고 다채로워서 뭐라 공식을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달라진 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젠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부로 믿지도 않는다. 다른 하나는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프로이트 식의 죄책감을 많이 거두어들여서 나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나 스스로가 그 말에 절대 권위를 부여해왔던 걸 생각하면 참 할 말을 잃는다. 이게 한편에서 보면 꽤 서글픈 모습이기도 한데, 이미 건넌 강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날이 저문다. 어른이 된다는 것, 안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생각하니 착잡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