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기억 속 타자: 나 자신일지도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5. 30. 03:39

기억 속 타자: 나 자신일지도.

가깝다는 이유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기억의 저편에서 잊히지 않고 문득 떠오르는 경험을 설명할 수 없다. 친밀함은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강한 인상으로 남지는 않는다. 눈을 감고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상황으로 되돌아갈 때마다 그 사건과 상황의 대변자 이기라도 하듯 어떤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 그러나 내 기억 속엔 항상 붙박이장처럼 고정된 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일까. 도대체 어떤 이유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떠오르는 걸까. 강렬한 인상을 내게 남긴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숱하게 그 기억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항상 그 사람을 만난다. 나이도 먹지 않고 옷차림도 그대로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에 잠기다 보면, 그 사람이 내가 만들어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 기억의 실재성, 역사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혹시 꿈에서 본 걸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혼란 속에 빠진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사그라들고 심장은 고요해지면서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때론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 구경꾼 중의 한 명, 혹은 뒷모습만 보인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 강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이, 그것도 전혀 모르는 인물이 내 기억의 고정 역으로 출연한다는 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생각도 해봤다. 그 사람은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사건과 상황에 상관없는 완전한 타자에게 나 자신을 투영하여 그때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인 갈망의 표출이 아닌가 하고. 그렇다면 그 타자는 누구라도 상관이 없게 된다. 단지 그때 그곳에서 내 시선이 처음 머물게 된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기억이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며, 객관적인 사건과 상황보단 내 마음과 생각이 어떠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뇌의 창작물일 테니까 말이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그 타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희미하게라도 눈빛이 보였다면, 얼굴의 선이나 표정이 읽혔다면 어쩔 뻔했을까 싶다. 그 순간 공포가 되어 나를 옥죄어올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내 얼굴이 보였더라면, 순간 공포영화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