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에 대하여
품위에 대하여.
자본주의의 병폐는 모든 분야에 침투해 있다. 돈이 되는 것, 즉 잘 팔리는 상품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가치 없게 여겨지는 시대다. 급기야 사람마저도 상품화되어버렸다. 돈을 얼마나 잘 버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쓸모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많이 번다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이 공정했든 정의로웠든 돈을 많이 벌었다면 더 이상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흐름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특히 누가 봐도 큰 범죄라고 여겨지는 일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남들 다 하는 불의를 동원했다 하더라도 그건 용인 혹은 묵인되기 쉽다. 돈 많으면 장땡이라는 조롱 섞인 우스갯소리는 어느새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자 진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모든 인간에게 자연법처럼 내재된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더 이상 미덕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이 깨끗할 거라고, 깨끗해야만 한다도 암묵적으로 여겨지는 분야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으로는 종교, 과학, 문학, 예술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한국 기독교의 꼴을 보면 적어도 종교 중 기독교는 과정의 깨끗함과는 상관이 없다는 게 만 천하에 알려진 것 같다. 현실적인 눈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믿음 완전 좋은 (?) 몇몇 (주로 이들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빼고는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나 할 것 없이 한국 기독교엔 이대로 가다가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내가 몸 담고 있는 과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험 결과의 재현 가능 여부에 대해서 언제나 말이 많은 이유는 과학도 종교처럼 과정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저널의 Impact Factor와 Retraction Factor가 정비례한다는 점은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한국에서 거의 20년 전에 벌어졌던 황우석 사건이나, 2013년 STAP cell로 희대의 뻥을 쳤던 일본의 오보카타 사례나, 최근 테라노스 창립자 엘리자베스 홈스 (당시 얼마나 그럴 듯한 캐릭터였던가. 자퇴생, 여성, 눈 파랗고 금발의 백인, 십대 천재 소녀!)의 유죄 판결이 확정된 사례 등을 봐도 이러한 정황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대표적인 사기극은 겉으로 드러나서 그렇지, 드러나지 않은 채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는 자잘한 사기극은 지금도 수많은 연구소와 대학 실험실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나는 그런 불의에 나름 저항하다 성공과는 상관없는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렇다면 문학 분야는 어떨까. 출판 시장이 10년 전과 확연히 다르게 줄어들었고,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들을 살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부풀려진 상품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좋은 책이라 함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이 아니라 많이 팔리는 책으로 재정의되기에 이른 것이다.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겉을 포장하고 과장하고 유명인을 이용하여 권위에의 오류를 범하는 등, 속에 있는 것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것들로 책이 평가받게 되는 시대가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책의 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출판인들도 어떻게 하면 많이 팔리는 책을 쓸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인 글을 쓸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의 눈을 집중시킬지에 대해서 골몰한다.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 걸 충분히 공감하데도 이는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든 것은 자본의 힘으로 귀결된다. 결국 돈인 것이다. 돈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해야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역의 명제가 성립되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들의 장래희망란에 상대적으로 일은 적고 쉬우면서 고소득 (불로소득 포함)을 챙길 수 있는 직업이 기록된다는 점만 봐도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변화가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 변화 속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이 점점 더 속보다는 겉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것 같아서,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안타까워서 그렇다.
SNS 중 아직까지 주로 텍스트로 승부하는, 주로 40-50대의 연령층이 주이용객인 페북이나 블로그에서도 글 잘 쓴다, 책 쓰자고 제안 받았다, 책 썼다, 등등의 흐름으로 너도나도 작가라는 타이틀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현상을 본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책 한 권 쓰면 작가이고, 책 한 권도 못 쓰면 작가가 아닌 것일까? 작가란 무엇일까? 저자와 작가의 구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적어도 나는 책 한 권 썼다고 해서, 아니 책을 여러 권 썼다고 해도, 단지 책을 썼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작가라고 불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저자일 뿐이다. 반면, 책 한 권 쓰지 못하더라도 쓰는 일을 일상에서 지속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저자는 아닐지언정 작가라고 불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즉, 작가의 정의는 성실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자본주의의 병폐에 따라 이러한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무조건 베스트셀러가 목적인 것처럼, 책 쓰는 목적이 돈 벌기 위한 듯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아직 낭만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작가라는 타이틀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불쾌하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란 적어도 돈 벌기 위해 (여기서 돈 번다는 건 기본 생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돈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쉽게 벌기 위해 하는 짓을 일컫는다) 쓰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없는 글을 왜 쓰냐고, 그런 책을 왜 만드냐고. 나는 반대한다. 책의 목적이 단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 반대한다. 작가가 쓴 글이 사람을 엔터테인할 수는 있지만, 작가는 엔터테이너가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엔터테인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작가라는 타이틀을 떼고 엔터테이너라는 타이틀을 달면 된다. 작가라는 타이틀에 먹칠을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