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려지는 훌륭한 사람
꺼려지는 훌륭한 사람
잘 알지 못해도 왠지 다가서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이유 없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것은 논리, 이성적인 판단과는 별 상관없이 주로 직관에 의거하는 우리 인간관계의 단상이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 알수록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이 역시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아무래도 위에 언급한 경우에서 말하는 직관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직관 (감정, 느낌, 과거의 경험에 주로 의지한다)은 논리와 이성 앞에선 언제나 힘을 잃는다. 토론에서는 백전백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결과와 상관없이 직관은 인간관계에서 늘 승리를 거둔다. 다시 말해, 사람을 산다는 건 논리와 이성만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논리와 이성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초록은 동색이요, 가제는 게 편이라, 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로 잘 쓰이지만, 사실 그렇게 비판하는 그 사람 역시 인간인 이상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난 그렇지 않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 하고만 관계를 맺어, 나는 항상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니까, 라고 자신에 차서 말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이런 부류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지만, 특히 자기 자신이나 자기와 얽힌 사람들의 유익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합리화를 하며 점진적으로 새로운 ‘norm’을 재정의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동물이지만 이성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기 쉽고, 사회적 동물이지만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기 쉬운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출발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볼 땐 그 사람은 유아적이거나 독단적인 사람, 혹은 사회적 지위나 부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를테면, 한 번도 틀리지 않았던 게 아니라 자신의 틀렸음을 수평적인 관계에서 있는 그대로 지적받아보지 못했던 사람 (aka 왕자 혹은 공주), 혹은 과거엔 그렇지 않았으나 운 좋게 피라미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거기에 맞게 재조정되어버린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마흔 중반에 이르니 세상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말과 글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과 교집합이 크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소위 유명한 사람들 중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사람이 가진 공식적인 지위와 권한, 그 사람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객관적인 업적은 충분히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원하는 이상적인 경우일 수 있다. 특히나 자신의 유익만이 아닌 공적인 일에 솔선수범해서 나서는 일까지 하는 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짚고 싶은 부분은 바로 ‘공식적’이라는 부분이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들에게 비춰진 겉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주관적인 판단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객관적 판단과 객관적 증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공식적인 모습은 그 사람과 개인적 원한이 있지 않는 한 모든 사람에게 훌륭함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는 어느 정도 연예인 같은, 흔히 말해 공인의 이미지와 겹치게 만드는데, 알다시피 그런 사람의 진짜 일상적 삶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거의 상관없는, 한 마디로 ‘비공식적인 모습’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사람과 사적으로 친분이 유지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부분은 바로 이 ‘비공식적인 모습’이 주를 이룬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거리가 조금 있는 팬 같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칭찬하고 존경한다고까지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공식적으로 드러난 모습’ 때문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이러한 부류에 속한 사람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기 쉽다. 사람은 보통 운 좋게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되어 자리를 잡으면, 그렇게 올라온 과정을 운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이라면서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과정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도드라지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쉬운 게 별로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그 사람의 권위에 눌려 냉철한 판단이나 지적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해도 안 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 결과 이런 사람들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수평적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별 흠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이러한 연쇄적인 작용으로 이런 사람들은 점점 독단과 권위에 잡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는 일의 중요성과 그 일의 의미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나는 ‘비공식적인 모습’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한 사람의 사람다움을 더 많이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진 사람에게 붙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들로부터 친절한 말 한 마디 들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람들이 되진 않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부쩍 많이 든다. 적어도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권위와 부의 영향으로부터 가능한 자유롭고 싶다. 이상적인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기 위해 깨어있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유명하지 않고 진실된 사람들, 비록 권위와 부는 가지지 못하지만 ‘비공식적인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남은 인생을 더 함께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려고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