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이중성, 그리고 작지만 끊임없는 저항
작지만 끊임없는 저항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매혹적인 일이다. 나는 늘 그 시간을 동경한다. 일에 쫓기거나 어쩔 수 없이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우리가 때론 적막한 광야를 일부러 찾는 이유도, 함께 잘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는 이유도 어쩌면 인간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라고 해서 모두 같은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찾은 광야는 어딘가 멋스러움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내던져진 광야는 삶의 가장 밑바닥과 맞물린다. 고독과 외로움도 자발적인 선택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관광객과 거주민의 차이랄까. 자기 필요에 따라 광야를 선택한 사람이 피할 곳 없어 광야로 내던져진 사람에게 함부로 광야에 대해 조언해선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선택해서 간 광야에서는 시와 노래를 담아낼 수 있겠지만, 내던져진 광야에서는 기본적인 생계만이 전부일뿐이다. 광야의 이중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다가 잠시 멈출 줄 아는 사람 모두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치달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잠시 멈춤은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지극히 비효율적인 일이다. 멈추면 멈춘 만큼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손해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가치를 위해 능동적으로 멈춤을 선택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나는 좋고 언제나 그렇게 되길 원한다. 이는 그 사람이 실질적으로 삶에서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삶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 좋다. 말로만 멋쩍은 사람, 팔짱 끼고 대가리만 커져 시끄럽게 모든 걸 비아냥대기만 하는 사람, 입만 살아있는 철학자, 삶과 분리된 채 머리만 커진 인문학자는 이런 손해를 절대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정치인이라면 카메라맨과 동행하여 그곳을 방문하겠지만 말이다.
멈춤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에 있어서 작은 저항이다. 물론 이런 저항은 견고한 시스템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살아있음은 움직이는 것이고, 그것은 아무리 작더라도 끊임없는 저항으로 증명될 수 있다. 해봤자 뭐하냐고 빈정대는 꼰대는 가라. 나는 소수이겠지만 늘 저항하는 사람을 찾고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