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걷기
걷기가 산책인 사람도 있지만, 궁핍과 가난의 행동양식인 사람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후자보다 전자가 많아졌다. 못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 너무 많이 걸어서 죽는 사람보다 너무 걷지 않아서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 현대인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걷는다. 하루에 만 보를 채우기 위해 사생결단을 한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변화다. 이른바 걷기의 수직 신분상승. 당신에게 걷기란 무슨 의미인가.
대학생이 되어 부모님을 떠나기까지 집엔 차가 없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 지하철, 그리고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기차. 토큰과 회수권은 나의 오래된 향수 중 하나다.
노선이 잘 연결된 경우는 드물었다. 하는 수 없이 걸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안이 없었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출발해야 했다. 한 시간 만남을 위해 한 시간 이상을 이동했다. 자연스레 이동 시간은 일과에 속했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게 아니라면 걷기만이 답이었다. 버스도 지하철도 없는 곳으로 이동해야 할 때면 택시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가길 포기하거나 걸어야 했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어서 목적지에 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미국에서 11년을 살다 와서 그런지, 한국 들어와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가까운 거리도 차를 몰고 나가려고 했다. 한국에 먼저 들어온 아내가 구입한 중고차 스파크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한국 오자마자 차를 구입했을 것이다. 처음엔 스파크가 도대체 뭐냐고 하면서, 내 키와 등치에 걸맞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얼른 차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경험을 하나둘 하게 되면 차를 바꾸려는 시도는 현실로 옮겨지지 않았다. 이젠 오히려 400만원 주고 아내가 구입한 스파크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참고로, 아내나 나나 출퇴근은 자전거와 걷기를 이용한다. 조금 불편한 일들에 익숙해지니 의외로 마음에 여유가 찾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보다 가정 경제 지출이 줄어든 것 역시 안비밀이다.
오늘은 한국 와서 처음으로 치과를 찾았다.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미국 같았으면 당연히 차를 몰고 갔을 것이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걸어갔다. 땀이 살짝 나는 거리였지만, 나는 나의 게으름을 이겨내기 위해 걷기를 선택했다. 당연한 듯 주차권을 발행해주려는 간호사에게 멋쩍게 말했다. “아니요, 걸어왔어요!” 전혀 없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내가 오늘은 좀 멋져 보였다. 앞으로도 나는 일상의 잔잔한 불편함들을 넉넉히 안고 가려 한다. 의외의 여유와 의외의 건강, 의외의 행복을 맛보려 한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