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업그레이드

가난한선비/과학자 2024. 9. 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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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니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연륜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행히 그 무렵, 직장, 집,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모든 걸 놓친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성실함이라는 포장을 뜯으면 그 안에 타성이라는 실체가 드러날 것 같았다. 많은 것을 희생시킬 정도로 분주했으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가치관의 변화는 기본 판을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노력과 성실을 재정의하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현재진행형일 때만 효력을 가진다. 지나간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해석 과정도 결국은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다. 현재를 위해 과거를 적당히 수정, 삭제, 추가하는 일은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해당되기도 하지만 자기 합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강한 자기 합리화는 합리화하는 주체인 나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완성된다. 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자기만의 재해석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가 전제되지 않은 자기 합리화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의 노력과 성실은 나를 더 날카롭게 벼르기도 했지만, 점점 더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깊기 파기 위해서는 먼저 넓게 파야 하는 법인데, 나는 넓게 파지 않고 깊이만 파려고 모든 애를 쓰는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온몸에 가시가 돋친, 몸은 다 큰 어른인, 어린아이. 방향을 바꿔야 했다. 내가 아닌 남을 향해야 했다. 그것만이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건 내 생애 가장 잘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관성처럼 굳어졌던 노력과 성실의 실체를 뜯어볼 시기가 온 듯하다. 남을 위한다 해놓고, 그러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는 방법들이 남에게 폐가 되고 있지 않은지 섬세한 눈이 되어 조곤조곤 살펴봐야겠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예상했던 결과를 능히 덮어 버리는 힘을 가진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업그레이드의 시간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