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기회

가난한선비/과학자 2016. 6. 21. 04:25

지나간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밥을 먹던 만남도 언젠가 때가 오면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는 건 내 몫이다. 부끄러운가. 아님, 여기서도 허세를 떨고 싶은가.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누린다는 것은 결국은 나에게 주어진 자극에 비뚤어지지 않고 솔직하게 반응을 하는 거다. 숨길 필요도, 부풀릴 필요도 없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반응하면 되는거다. 어린아이처럼.


누구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면, 이미 당신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놓친거다. 물론 주위의 상황을 전혀 신경쓰지 말고 맘대로 행동하라는 건 아니다. 다만, 당신이 의식하고 있는 “그 누군가”는 알고보면 당신의 비뚤어진 자아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은 그 규모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주관적이고 비뚤어진 자아에 의해 결정되고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한동안은 그 시발점 때문이라고 핑계댈 수 있겠지만, 조그마한 한계를 하나둘씩 부딪히다 보면 이내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내면 세계에 존재하는 비뚤어진 자아를 옹호하기로 마음 먹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 자아를 그대로 시인하면서 동시에 내면에서부터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를 긍정적으로 표출하기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불의와 거짓의 일상화를, 자신의 능력이 받쳐만 준다면, 용인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 발 뒤로 빠지는 자세를 취하게 되며, 후자는 그동안 잘못 들어섰던 길을 되돌아 나와서 정의와 진리의 입장에 서게 된다. 출발은 같았다. 끝이 다른거다. ‘이단’인 거다. 그렇다. 이단의 시작은 스스로의 내면 세계에서부터의 작은 유혹을 용인하면서부터다. 차라리 그 순간 문제가 터져버려서 한창 합리화 작업이 일어나려고 하는 마음과 생각에 브레이크가 걸려 버렸다면 나았을 것이다. 피가 나면 그렇지 않은 상황보다 그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보게 되는 게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에게 터진 문제는 하나의 브레이크일 수 있다. 나에겐 문제가 생겼다기 보단 이 상황을 보다 사실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거다. 나도 모르게 불의를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묵인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또다시 나의 욕심을 위주로 모든 걸 합리화하며 이끌고 온 건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볼 때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