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스럽지 않고 인간답게
인간스럽지 않고 인간답게
안주하는 자의 부지런함은 벽과 같은 우물을 더 견고하게 해서 세상으로 만들고 자기를 가두고 남까지 가두는 재앙을 가져온다. 깨어 있지 않으면 휩쓸리게 된다. 분별하지 못하는 자는 선동당할 뿐이다. 게다가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유익에 따라 선과 악을 취하기 마련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렇게 선악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데에서 비밀스러운 ‘자유‘를 느끼고 희열 한다. 선동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세상이 된 우물은 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우월감에 젖은 짐승이 사육되는 곳으로 전락하게 된다. 시간문제다.
선동당하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고 싶은 자는 ‘공부’ 해야 한다. 학창 시절의 학점 받기 위한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이루기 위하여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히기 마련이므로), 나를 찾기 위하여 (나를 알아야 낮출 수 있고 남을 배려하고 섬길 수 있기 때문에), 함께 하기 위하여 (아무리 혼자 유레카를 외쳐도 함께 할 수 없는 자의 깨달음은 너무나 자주 망상에 그치므로) 지속적으로 읽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성찰하고), 쓰고 (통찰하고), 나눠야 (이전 모든 과정이 열매를 맺는 단계) 한다. 이것이 ‘공부‘이다.
나는 앞으로도 ’공부‘하는, 이른바 동지들과 함께 하며 깊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인간스럽게 사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짐승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짐승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인이라는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