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인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6. 9. 9. 05:27

집단끼리의 비교 연구에서 도출된 차이점을 놓고 해석하는 것도 재밌지만, 한 개체의 성장과정을 팔로우업하면서 그 개체의 심정변화와 더불어 그 개체가 어떻게 그가 처한 상황을 처리/합리화해 나가는지 관찰하는 건 더욱 재미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모두 봐야 그 개체의 일반적인 캐릭터를 그나마 더욱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 자신의 필드에서 작던 크던 성공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어낸 업적을 뒤돌아볼 때, 겸손하게 보이려는 미사여구를 갖다 부치든 아니든, 자신의 공로를 강조하게 된다. 돌아보니 기존에 나와 있는 바람직한 성공자의 자세/습관 중 자신의 행동과 겹치는 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터뷰용 답변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서운 건 후배들 앞에 섰을 때다. 그들의 눈엔 다들 성공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들은 자신으로부터 성공자의 팁을 전수받길 바란다. 스스로 돌이켜 본다. 자신이 생각해도 또 남들이 봐도 납득이 쉬울만한 장점들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뭐 직장에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다던지, 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던지, 늘 why라는 질문을 했다던지, 뭐 주말엔 확실히 휴식을 취했다던지, 퇴근할 땐 일거리를 절대 가지고 가지 않는다던지… 별의 별 말을 다 하며 후배들의 빛나는 눈동자에게 화답을 한다. 그리고 나선,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성공을 일구어낸 진짜 이유인 것마냥 각인되어 버리는 것을 경험한다. 더 불행한 건 그러한 행동들이 성공을 얻기 위한 필수 선행 조건처럼 되어버려 자타가 그것에 얽매여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한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후, 비록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행동을 해도 원하는 성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맞이하게 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왜 나는 안되고 저 사람만 되는가? 혹시 저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만 가르쳐주지 않은 게 아닐까? 아님 내가 노력을 덜해서 그런건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중요한 건, 그 지침을 따랐지만 성공을 성취하지 못한 후배들 뿐 아니라 그 강연을 했던 자신조차 그 다음 성공을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럼 뭔가? 도대체 난 어떻게 해서 그 성공을 했던 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미안하지만 아무리 질문해도 답은 없다. 진짜 정답을 알기 위해선, 당신의 그 성공은 당신이 강연해왔고 당신도 모르게 그것을 해야만 된다고 속아왔던 그 지침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지속된 실패를 거듭하고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이내 부끄럽기도 하고 후배들에게 강연했던 그 내용이 진실이 아니었음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반대로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하며 합리화도 하는 과정을 거친다. 비로소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자신이 경솔했음을 후회하게 된다. 성공과 실패는 노력의 정도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논리적이진 않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내 한계를 넘어서있는 그 무언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저 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드디어 자신의 한계선을 감지하게 되고 인지적이고 논리적/합리적/과학적인 어프로치를 넘어서 종교적인 마인드도 갖게 된다. 뭔가 큰 힘이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그것이 자신과 맞을 때 성공이란 히트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뜬금없이 선행도 해보고 구제도 해본다. 마음이 착하고 바른 상태여야지만 그 힘이 나에게 미소를 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회도 가보고 절에도 가보고 이것저것 마인드 콘트롤같은 훈련도 참가해 본다. 좀 철이 드는 것 같고 현자가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지혜로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안된다. 그럼 도대체 뭔가?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자신의 첫 성공조차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이 해낸 성공조차 해석해내지 못하면서 남들에게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해왔던 셈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난 이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인간의 스테레오타입을 발견한다. 인간은 저렇게밖에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착하고 바르고 피땀흘려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한번의 성공 후에 위와 같은 패턴의 과정을 겪는 경우가 아니라 아주 드물겠지만 두번째, 세번째 성공도 성취해 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자신의 노하우를 관철시키는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마치 실험으로 치자면 reproducible하다는 것을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은 그 연속된 성공이 운빨이 희한하게 계속 먹혀들었다고 한편으론 해석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듭된 성공은 인간을 굳어지게 한다는 명제에서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증거를 보고 뭐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조차 인간이며 자신의 그 증명된 노하우가 먹히지 않을 때는 (혹은 운빨이 안 따라줄 때는) 곧 오게 된다. 그것이 언제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오는 것은 정해져 있다. 아무래도 더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이 떨어질 때 낙차가 큰 것처럼 그 사람에겐 엄청나게 힘든 시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자신을 위해서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착하다 (성선설) 내지 나쁘다 (성악설)의 차원이 아니다. 이기적이라는 더 근원적인 거다. 이 본성을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정의한다. 단지 도둑질하거나 살인하거나 하는 정도의 레벨에서 죄를 정의하는 게 아니다. 훨씬 더 근원적이며 깊은 차원이다. 그리고 그 차원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떠난 사건이 있다. 바로 인간이 죄인이 되는 순간이다. 즉, 현재 우리가 죄라고 판단하는 행위들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떠나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던 그 사건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기 보단, 우리들이 우리들도 모르게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는 논리다. 아무리 착하더라도 그 인간의 중심에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다. 생존을 위한 욕구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그런 욕구가 생겨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곳은 기독교가 유일하다. 다른 종교에서는 정욕이라는 것으로 설명을 해주지만, 사실 그 정욕조차 기독교에서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셈이다. 정욕도 죄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정욕은 죄의 뿌리에서 나온 첫 싹일 뿐이다.


이처럼 한 사람을 보든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보든 인간은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은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죄인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사건은 우리에겐 가장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한계를 인간 스스로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즉 죄인이 죄인을 구원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죄없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희생양으로 삼으신 것이다. 뭐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우리 인간들이 정의한 과학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땐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이런 글 하나로 당신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진 않겠다. 그렇게 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영적인 속성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저 생계유지나 눈 앞에 보이는 성공과 행복만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인간의 진짜 정체성과 존재 이유, 그리고 존재 목적을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여태껏 자기 힘과 능력으로 별 탈 없었던 사람들은 아무런 끄떡도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이 글조차 읽지 않았던가, 도중에 그만 뒀을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만). 그러나 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의 한계를 만나는 그 언젠가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기가 올테니깐. 난 단지 그게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랜덤하게 외치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