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저,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을 읽고
낮은 곳, 거듭나는 곳, 하나님과 동기화되는 곳
구미정 저,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을 읽고
제목에 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인생의 낮은 점을 통과한 후 가치관과 신앙관의 변화를 겪었고, 그렇게 만난 죽음과 부활의 기로에서 감사하게도 부활로 인도받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낮은 자리에 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비록 나 같은 경우, 일방적으로, 또 수동적으로 코너에 몰리듯 낮은 점으로 가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낮은 점으로 가게 되는 경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렇게 통과한 이후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향한 삶을 추구하는지 남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지가 관건이지 않을까 싶다. 큰 환란은 악한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들 수도 있고 선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란과 그것을 견뎌낸 것 자체보다 그것을 견뎌내는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인해 변화된 현재 삶의 열매가 구원과 부활의 가시적인 증거일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살아있으며 이론이 아닌 실재다.
사적인 경험을 통해 일반화에 이르는 길은 자칫 오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속에도 보편적인 진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 진리의 눈으로 특수성을 해석할 때의 일반화는 더 이상 오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개인의 작은 내러티브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더 알게 되며 그분을 더욱더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특히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은 그 인물만이 아닌 그 인물을 지으시고 배후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설교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다니엘, 베드로, 바울 등 성경을 이루는 각 책이나 잘 알려진 내러티브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모두 인생의 낮은 점을 통과한 전적을 가진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설교에서 주로 다뤄지는 부분은 이들이 낮은 점에 위치할 때가 아닌, 소위 ‘올려짐‘을 받아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시적인 부나 권력을 갖게 된 모습에 국한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 혹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나와 내 가족이 잘된다는 번영신앙을 대변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 아직도 많은 한국교회는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이 아니다. 교회 밖 세상에서 대접받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이유로 버젓이 대접받는 문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화되어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이 지배적인 사상과 이념으로 자리 잡은 문화가 견고하게 정착하여 예수가 늘 함께했고 강조했던 소외된 자, 억눌린 자, 약한 자, 우는 자들은 배제되고 차별되며 급기야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마는 존재로 치부되곤 한다. 말로는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부르짖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전도와 선교의 효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모습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씁쓸한 교회의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예수가 있어야만 하는 곳에 예수가 증발되었으며, 이미 온 하나님 나라는 마치 저 멀리 영원히 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실 예수님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마음을 지키기란 한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복음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사적인 복음에 더욱더 갇혀 버린 그리스도인들. 게다가 반지성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부끄러움도 없이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부추기는 많은 목회자들과 중직자들까지 합세한 모양새는 지극히 비상식적이라 세상을 살려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더 타락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세상의 욕을 다 들어먹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그리스도인이지만 현실의 시선을 고려하면 낯뜨거움을 면할 수 없다. 교회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한 가지 답을 이 책에서 찾는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만 보이는 것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다시 가치관과 신앙관을 돌아보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의 복음이 아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가변적인 사상과 이념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회심하는 것이다. 기름진 배를 안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낮은 자리는 편리함과 게으름과 말초적 유희에 길들여진 자들에게는 보이지도 열리지도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함몰되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책 속에서 저자가 사용한 표현대로 예수의 시선에 동기화를 함으로써 더 이상 기존 세상의 눈이 아닌 예수의 눈으로 복음의 눈으로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눈으로, 울리는 자가 아닌 우는 자의 눈으로, 억누르는 자가 아닌 억눌린 자의 눈으로, 즉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의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교용으로만 들렸던 혹은 설교용으로만 전했던 전복적인 예수의 말씀들이 그제야 실체를 가지고 귓가에 울려 퍼지고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으로 여겨지기 시작할 것이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진리가 진리로 들리게 되고, 마침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창세 전에 계셨던 말씀, 하나님 본체라는 영적인 깨달음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전적인 인정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압도되어 비로소 눈이 열리게 되며 새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속 낮은 자리에 처해진 여러 인물들을 소환하여 과거와 현재 인류가 벌인 악의 역사와 연결하고 성찰을 거쳐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소중한 통찰을 선보인다. 기독교윤리 전공자답게 시간과 공간이 상이한 성경 속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본다. 한강 작가의 말을 빌려 과거(성경 속 이야기)가 현재(오늘날 세상)를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낮은 자리에 처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렇다. 낮은 자리는 실패한 자리가 아니다. 그곳은 다시 시작하는 자리다.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처럼 부활하는 자리다. 죄와 악에 물든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관찰하고 성찰한 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로 동기화되어 다시 세상 속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출발하는 자리다. 그곳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유독 마음속에 깊이 담긴 단어가 있다. ‘섬김’과 ‘공공성’이다. 이 두 단어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한계를 만났고 무너졌었다. 그러나 그 낮은 곳엔, 다른 성경 속 인물들처럼, 하나님이 계셨다. 그로 인해 나는 회복할 수 있었으며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으로 살아가길 서원했다. 낮은 자리에서 붙잡은 이 두 단어는 조금씩 내 일상에 스며들고 있으며 아주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실패로만 보였던, 어둡게만 보였던 낮은 자리는 은혜의 자리였고 새 출발의 자리였으며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가다듬는 소중한 자리였다. 힘들 때마다 불안할 때마다 나는 이 시절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동기화되는 시간이다. 부디 남은 삶도 이 연장선상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게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통찰을 함께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두 주인을 놓고 여전히 분주한 마음속에서 갈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