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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저, '철학 고전 강의' 1부를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5. 6. 19. 09:50

강유원 저, '철학 고전 강의' 1부를 읽고

풍성한 읽기 = 문학 속 철학 읽어내기 + 철학으로 문학 깊게 읽기

내가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문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읽기 위해서였다. 마흔이 다 되어 독서를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문학만 읽어서는 문학을 깊고 풍성하게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모든 공부는 비슷한 논리를 가지는 것 같다. 일례로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배경, 지리적 배경, 문화적 배경 등, 소위 다른 영역의 글들을 읽지 않으면 성경에 쓰인 수많은 비유와 상징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채 작디작은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배경지식 혹은 '카더라 통신'에 의한, 다분히 미신적이고 반지성적인 촌평들에 의지하여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농후해지기 때문이다. 성경 통독을 수십 번 한 믿음 좋고 신앙 좋다는 어르신들이 반지성적인 집단이나 극우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도 이런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게 내 지론이기도 하다. 한 우물만 파게 되면 장인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밖에 모르는, 스스로는 순수한 정통파라고 자처하겠지만, 바보 멍청이가 될 뿐이다.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면 그건 순수가 아닌 고인 우물이 될 뿐이다.  

강유원의 철학 고전 강의 1부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그리스 철학의 시작으로써 세계 전체에 대한 통찰에 대해서다. 헤시오도스의 '신의 계보'를 통해 우주론이 철학적 사유의 시작일 수 있다는 강유원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고,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이원론, 즉 일자와 이데아로 일컬어지는 불변하는 초월적 실재 혹은 참된 세계,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사는 감각으로 파악되는 현상계 혹은 거짓 세계, 이 둘로 구분하는 철학을 오랜만에 재점검하며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인간의 한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으로부터 세 가지 사유를 끄집어낸 강유원의 해석에서 매력을 느꼈는데, 그것은 학의 시원에 관한 논의로써 의심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고 알려진, '있음'도 아니고 '있지 않음'도 아닌, 철저한 관조자 입장의 중요성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공부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라는 생각도 했다. 특히 서로 대립되는 존재와 무를 모두 생각해야 독단에 빠지지 않는 완전한 사유가 된다는 말에 나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소개하며 존재와 무에 대한 관계로부터 투쟁과 생성의 개념을 이끌어내는 부분에서도 나는 감동을 느꼈다. 존재와 무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파악할 때에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존재는 존재만으로 알 수 없고, 무는 무만으로 알 수 없다. 마찬가지다. 밝음은 밝음만으로 알 수 없고, 어둠은 어둠만으로 알 수 없다. 진리는 진리만으로 알 수 없고, 비진리는 비진리만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이 생성이라는 조화를 이루고 일치되는 과정이 곧 투쟁이자 전쟁이라는 것, 이것이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원리라는 것. 명쾌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통찰이 아닐 수 없었다. 대립되는 존재자가 서로를 더 밝히 비추고 드러낸다는 것,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 투쟁으로부터 자기 동일성을 추출해 내는 사유가 내겐 1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보리 음료'를 예로 들며 설명하는 자기 동일성, 즉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전체를 이루며 비동일성을 띠는 대립적인 것들의 투쟁이라는 것을 나는 최근에 읽은 헤세의 '데미안'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철학 공부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강이 여러 강물로 이뤄진 것이라는 통찰에서 '나'는 여러 '자아'로 이뤄진 존재라는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를 이루는 여러 자아들은 서로 대립적일 때가 많다. 비동일성을 띨 때도 많다. 그것들은 서로 투쟁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비로소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이지만, 모든 자아들이 있어야만 전체이자 하나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살아있는 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자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도 여러 자아들 (새롭게 생겨나는 자아 포함)의 대립과 투쟁을 통한 조화와 일치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데미안'에서 중심적으로 말하고 있는 메시지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모든 인간이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루게 되는 우주적인 원리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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