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선교: 적절한 세상화가 답인가, 아니면 확실한 하나님화가 답인가?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 25. 02:38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충실하든 불충하든,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이라고 했으며, 마찬가지 맥락에서 존 더햄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는 유리 진열장”과 같다고 했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인문/사회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독서를 방편으로 삼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서적 (특히 복음주의적이고 정통적인 신학을 소개하거나 연구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불교를 비롯하여 다른 종교에 관련된 서적은 별 거리낌없이 구매하여 자기들의 리스트에 넣는다. 기독교는 보통 열외다. 이유는 간단한 통계 자료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요즘 청년들이 종교를 가지고 싶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1%도 미치지 못하는 비율로 개신교가 선택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이미 한국에선 개신교의 이미지가 땅에 실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보도되는 종교인의 타락과 비리는 십중팔구 개신교에서 비롯된다. 박ㄱㅎ와 최ㅅㅅ 게이트에서도 핵심 범죄자들의 절반 이상은 개신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초대형교회 몇몇이 조그만 한국 땅에 있으며, 그 초대형교회 목사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온갖 권력과 비리와 돈, 게다가 성범죄까지 연루되어 있음은, 뭐 더 이상 요즘 개신교의 전체 이미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할 말 없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이제 시작되었거나 아직 없는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교회에서 꼭 선포해야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약화시킨다. 너무 강하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떠날까 싶어서다. 그래서 주일 예배의 설교 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구역/목장 모임에서도 그저 맛난 것들 함께 나눠 먹고 노닥거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위한 배려라는 게 그들의 이유다. 그 배려에는 함께 나누고 친절하게 대하면 그들의 마음 문이 열려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가 숨어 있겠지만 그런 순간이 찾아 오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정작 예수님에 관심 있어서 온 초신자들은 세상 속의 여느 사회적 모임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여 결국 떠나고 만다. 이 경우, 그들의 배려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성경적이다/이지 않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내가 성경을 잘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성경과 함께 신학 사적을 찾아본다.


신명기 4:5-6 말씀이다.


|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


요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고자 애쓰면 열방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결코 세상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과 정면적으로 대립되는 세상적 삶을 병행하며 양다리 걸친 삶을 사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면 그들이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열방이라고 한다면, 그 열방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이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선교일텐데, 우리들이 현재 교회에서 하고 있는 어줍짢은 시도들이 처음 뜻은 같았으나 방법이 전적으로 반대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개신교의 이미지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하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근본주의자들처럼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과 이분화하여 우리들이 흔히 교회 활동이라고 간주하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에만 몰두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윤리적 특성이 열방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데 중대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선교와 윤리는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이 알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분의 살아 있는 백성의 행위 속에서 드러나야만 한다. 물론 먼저 믿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위에 적힌 신명기 말씀을 믿는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행할 때 (예배,찬양,기도 뿐만 아니라 삶에서의 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어야 함), 오히려 세상 사람들부터 하나님 백성들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매력적인 사람들로 보여서 결국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가오게 되고 배우고 싶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절한 세상화은 결코 답이 아니다. 오히려 확실한 하나님화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