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친절의 이면을 보다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3. 28. 05:26

미국의 주류를 이루는 백인들이 친절한 사람들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몇 년 만에 그들의 예의가 철저히 계산된 잔인함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00%가 그렇진 않겠지만). 여기서 잔인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그들의 친절에는 동등한 인격으로서의 존중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배워온 것이다. 첨부터 의도한 게 아니다. 그것이 그들이 친절을 베푸는 수혜자들로부터 잔인하다는 말을 듣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친절한 예의도 충분히 인격 살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난 미국에 와서 배우게 되었다.


예의를 갖춰야 하니 할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못한다. 예의와 친절함은 그 자체로써 좋은 면이 많지만, 그 미덕이 가장 추구해야 하며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인격에 대한 존중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들의 예의과 친절함은 이렇듯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특히, 예의와 친절함은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상황을 교묘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조종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국에 온지 6년도 채 되지 않은 이방인인 나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아무 때나 그런 건 아니다.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그런 가면을 눈치 채기 어렵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어떤 경계선을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들은 돌변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의 끝을 터치한 것이다. 순간, 그 발화점을 건드린 이방인은 침입자로 규정이 되고 곧바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 그 대우를 받아 본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나도 그들 중 하나다.


그들의 입장 변화의 근거는 물론 그들이 아니다. 침입자의 정체를 '비로소' 드러내게 된 바로 우리들이다. 모든 블레임의 방향은 우리를 향한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때, 그들이 지금까지 우리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충분히 간파할 수 있는, 그들의 본색이 드러난다. 동등한 입장이라면, 실수이겠거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등한 존재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여 반항을 했다고 판단이 되어진다면,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말도 다르다. 말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얼굴 표정 변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마치 ‘아니, 감히 나에게…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아량을 베풀어 줘왔는데… 이 버러지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


그렇다. 분명하다. 차별이다. 과거에 그들과의 관계가 아무리 좋았다는 느낌을 가졌더라도, 그 관계의 본색만은 철저히 숨겨져 왔던 것이다. 바로 그들의 ‘예의’가 모든 것을 지배했고, 우리 유색 인종의 이방인들은 그 지배에 만족하며 행복했었다. 절대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유리장 안에 갇힌 새처럼.


나는 인내를 배워야 했다. 의미 있는 변화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유리장이 유리장이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데까지는 필요없을지 몰라도, 그 유리장을 넘어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은, 난 오직 인간이란 존재의 정체성의 근원을 사유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색깔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숫자로써 규정하는 게 아니다. 힘으로써 차별하는 게 아니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공통분모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그 중심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