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생존과 공존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8. 4. 02:21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흑백논리는, 생각이 같으면 아군, 다르면 적군으로 구분지어 싸움을 조장한다. 나누는 자나 나뉘는 자나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게 되고, 상대방은 틀렸기 때문에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극한 논리로 치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그런 극단적인 제거작업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설사 그것이 부분적으로 행해졌다더라도 또다시 그곳엔 새로운 진영이 생겨난다. 이번에도 또다시 생겨난 반대파를 처단할텐가? 이러한 과정은 알다시피, 반으로 계속 나누는 무한 수열과도 같다. 그것은 결국 제로로 수렴한다. 모두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모두가 소멸되는 방향으로 무한히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어느 한 진영이 도드라질때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공평과 불공평, 깨끗함과 더러움, 실패와 성공, 부자와 거지, 금수저와 흙수저, 등등 수많은 대립적인 커다란 두 기둥 사이에서 우리 인간은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 우린 놀랍게도 죽음으로 수렴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음으로 “공존”하고 있는것이다.


이렇게 밖으로 나타난 세상의 나뉨이 있다면, 우리 내면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의 내면 역시 두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이성과 감성, 논리와 감정, 순종과 불순종, 사랑과 미움, 관심과 무관심, 절제와 무절제, 자유와 방종, 등등의 수많은 대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따지고보면 그토록 수많은 대립의 각에 찔려 피흘려가면서도, 놀랍게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무한한 대립각을 만들어낸 이분법적인 사고나 흑백논리라고 칭하는 것들이 그것들의 이론적인 시뮬레이션 결과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 그 무한수열의 극한은 수렴이었고 그 수렴값은 제로였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간은 영리하여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런 이론은 사유체계에 국한시켜 버렸고, 또다른 더 큰 세계, 즉 사느냐 죽느냐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중요하고 커다란 두 세계와의 싸움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결론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알고보니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골치를 아파하고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하기까지 하며 사유했던, 철학적이고 실존적이며 때론 신학적이기까지 했던 모든 가치 체계를 단번에 무시하고 합리화시킬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싸운다. 어찌보면 싸우는 게 정상이다. 스스로 통합되고 단일화되어 정돈된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수많은 내면의 대립 세계로부터 가까스로 어떻게든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그것도 서로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어찌 싸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 싸우지 않는다면 그건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 별 지장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에서 본다면, 인간은 공존하고 있다. 물론 그들 각자는 생존하려고 투쟁하지만, 결국은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도대체 어떤 더 중요하고 커다란 문제의 결과에 따른 것일까? 어찌 인류는 멸망의 방향으로 수렴해가지 않는 것일까? 왜 소멸로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인구는 늘어나고만 있는것일까? 그것도 더욱 더 다양한 “두 세계”의 탄생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그로 말미암아 더 많은 갈등과 싸움이 팽만한데, 도대체 왜 인류는 공존하고 있는걸까? 모든 가치체계에서 우위를 점했던 "생존"을 이긴 이 "공존"이란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그 승리의 메커니즘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