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faith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공공성"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8. 4. 02:44

"하나님나라는 어떤 곳일 것 같아?" 


아, 난 이런 대화가 너무 좋다. 구원받고 못받고를 규정짓고, 각자가 정한 규칙에 근거해서 서로를 정죄하고 차별하고 배척하는 피곤한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싸움에서 벗어나, 이런 열린 질문을 하며 서로의 얘기를 경청하고 나누고 자신의 현재의 삶과 연결시켜 사유하는 공동체.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며 풍성하게 나누는 공동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복음을 듣고 알고 믿는다지만, 그것이 개인의 구원과 윤리적인 차원만을 위한 거라고 여긴다면, 분명 그 복음은 (결국 나 중심의 착한 일 정도이기 때문에) 원죄의 아래에 놓인 종교와 같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가 죄인이라는 점을 공히 인정한다더라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만 죄가 해결된다고 보는 바울의 칭의 개념으로만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과연 그 복음이 온전한 복음일까. 복음이 영적인 비밀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복음을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고 개인적으로 내면화시켜 버린다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일까. 이 세상은 장망성이고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이 없어서, 복음 가진 우리들이 해야할 유일한 사명은 다른 것 다 팽개치고 영혼 구원을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해 전도현장으로 뛰어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망이라는 것이 그저 이 세상이 끝나고 어딘가에 있을 천국으로 구원받아 올라가서 포도열매나 따먹으며 비스듬하게 누워 하프나 켜며 하루 죙일 여유부리는 편한 삶을 바라는 것일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 하나님나라를 누린다는 것은 정말 무슨 말일까.


하나님나라 복음은 예수의 태어나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이 당연히 핵심으로 여겨지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공생애 기간동안 하신 일과 그가 가졌던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의 40일동안 하나님나라를 제자들에게 굳이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구원받기 위해선 예수와 바울이 공부하고 사유하고 말하고 전했던 구약이 전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그들의 근거로 주장하는 바울의 칭의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기적으로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복음을 작위적으로 해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누리라는 말을 교인들 사이에서 덕담처럼 하는데, 과연 그 말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 그저 “승리하세요!” 하는 말처럼 애매모호한 교인들만의 기분좋은 은어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오늘 김근주 교수님의 책을 읽다가 유레카를 외쳤다.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우리들이 행할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나라가 임한 증거 중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의지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죄인은 결코 타인을 공감하거나 자기자신처럼 사랑하거나 자기에게 별 유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에게, 그리고 공동체에게 임한다면, 그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누린다는 증거 중 하나인 것이다! 지금껏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사고방식으로 신비주의적이고 기적적인 어떤 현상만을 하나님의 일로 여겨온 기성세대들의 복음을 대하는 관점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복음의 공공성”, 읽은 지 몇 페이지 안되었지만 벌써부터 멈추어 묵상할 부분이 많다 (그래서 진도가 안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