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인격과 성령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9. 24. 04:27

"싱글싱글 웃으면서 인상 좋게 생겼는데, 말하는 꼴을 보니 거만하기 그지 없더라."

"딱 보기만 해도 포스가 느껴지고 험상궂게 생겼는데, 하는 행동을 보니 겸손하기 그지 없더라."


전자가 점점 더 넘쳐나는 것 같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겼다. 좋은 겉모습처럼 원래는 거만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 사람도 인간인지라 유혹에 넘어가 나중에 거만함을 취득한 걸까? 아니면, 원래 거만했던 사람인데, 진화를 거듭하며 인상 좋은 얼굴 표정까지도 획득한 걸까? 어느 것이 사실일까?


후자는 시대가 변해도 늘 낮은 비율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도 똑같은 궁금증이 생긴다. 험상궂은 것과 겸손한 것의 조화롭지 못함에 대한 호기심이다. 원래 겸손했는데 험악한 세상 살이에 의해서 얼굴까지도 험상궂게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험상궂은 얼굴처럼 세상을 험악하게 살았는데, 나중에 어떤 계기로 인하여 겸손함을 갖추게 된 걸까?


인상 좋게 생겼으면서 겸손하기까지 하면 가장 좋겠지만, 세상에선 그런 이상적인 일치됨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세상은 전자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 결과 세상에선 위선자와 사기꾼을 대거 등장시켰다. 우린 보통 전자를 보고 위선자와 사기꾼을 떠올리지, 후자를 말할 때 그런 단어를 사용하진 않는다.


그렇다. 위선자와 사기꾼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속한다. 겉모습의 수려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위선과 사기에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 겉모습에 상관없이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이 달린 문제에 부딪힐 때 똑같은 유혹을 느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유혹을 극복하는 힘 역시 결코 겉모습의 수려함의 정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도 함께 인지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래서 중심을 보는 하나님이 좋다. 겉모습에 의해 대부분이 이미 판단되어 버리는 사회에서는 불의가 불의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베이스로 하여 불의가 가져다 준 시스테믹한 평화를 존속시키는 것에 일조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괴리감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 주인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예수 복음이 있고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해서 이 세상의 불의가 사라지진 않는다.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름 받았다.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함을 인격으로 번역하여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가도록 말이다. 이 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유일한 힘이다. 천성적인 선함도, 천성적인 악함도 인간이라는 껍질을 벗어버리게 할 수는 없다. 모두 한계를 가진 유한한 의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성령의 조명하심에 달려 있다. 그러나 자칫 착각하면 안 된다.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해서 신비주의적으로 여겨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원래 지어진 원래 인간의 참된 모습, 인간됨을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누군지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알려주고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선과 악의 분별, 옳고 그름의 분별의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움. 그것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성령에 있다. 난 오늘도 성령의 내주하심에 감사하고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을 구한다. 분별의 기준을 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