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과학자 (생물학자)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9. 24. 04:30

뛰어난 관찰력, 명석한 두뇌, 탁월한 분석력, 좋은 손, 나아가 유익한 토론을 할 수 있으며 동료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인품과 성품까지. 이것들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후학들에게 과학자가 갖춰야할 덕목으로 흔히들 하는 조언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사실 난 그 한 명을 안다. 대학원 입학 면접에서 이재운 교수님께선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좋은 머리'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다. 덧붙여, 한 사람을 꼭 짚어서 비교해 주셨는데, 바로 같은 랩에 있는 본경이었다. 본경이보다 똑똑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난 자신 없다고 했다. 대신 더 성실할 수는 있다고 구질구질한 대답을 했다. 지켜보겠다고 하셨다. 열심히 해보라면서 합격시켜 주셨다), 고급스럽게 자신의 교만을 감추는 방법이 다를 뿐, 우회적으로 다들 비슷한 조언을 하게 된다. 듣는 이들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 대답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곤 한다.


2003년 대학원생부터 과학자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치면, 올해가 2017년이니까 벌써 15년차다. 포닥을 2009년부터 시작했으니 프로로서는 9년차다. 충분히 과학자라는 직업에 대해서 한 마디 해도 될 것 같다.


난 위에 언급한 과학자가 갖춰야 할 소양을 반대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수준을 좀 낮추고 싶을 뿐이다. 중간 레벨로. 평균 정도의 머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즉, 본경이보다 더 똑똑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현재의 본경이와 나를 비교하면 내가 덜 똑똑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지만 (덜 똑똑한 건 사실이니까. 본경이는 내게 있어 과학자로서는 스승이니까), 그것이 출세하고 안하고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본경이보다 똑똑한 사람들 중 출세못한 사람도 많고, 반대로 출세한 사람들 중에 능력이 심히 의심스러운 사람도 허다하다.


그 대신 강조하고 싶은 것 하나는 '견뎌낼 수 있는 힘'이다. 한마디로 '인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를 시작하고 진행하다 보면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다. 가설은 가설로만 남을 때가 많다. 훌륭한 아이디어에 완벽한 실험 디자인, 부러워 할만한 연구 기자재를 코 앞에 둔다고 해서 우수한 연구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치열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거기에 올인한다고 해서 훌륭한 연구 실적을 낼 순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어쩌다가 출세한 사람들의 교만한 겸손의 포장지일 뿐이다.


연구란 원래 잘 안 되는 거다. 생각대로 되면 누가 네이처를 내지 못하겠는가. 관건은 '시기'다. 물론 그 시기가 왔을 때 잡지 못할 정도로 기본 소양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앞서 얘기한대로 박사 학위를 정정당당하게 받았다면,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박사란 스스로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그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설을 세울 줄 알고, 그 가설을 시험할 실험을 디자인할 수 있으며, 재현성 있는 실험으로 믿을만한 결과를 내어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당한 박사 학위 소유자라면 누구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연구 실적으로 변환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극소수의 천재들만의 놀이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기회는 드물게 온다. 내 경우는 5년에 한 번 정도 오지 않나 싶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소양 (기억하라. 최고의 소양이 아니다!)을 갖춘 과학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인내다.


그 살아남는 과정은 과학자들에게 있어선 고난과도 같다. 특히나 시대가 시대인만큼 성실함과 똑똑함만으로 살아남기란 정말 힘들다. 결과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5년 정도마다 한 번씩 오는 기회를, 언제 올지 모를 그 기회를 만나지 못한다면 과학자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하고 모든 젊음을 바쳤던 과학계를 떠나기도 한다. 실제로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한 달전부터 데이터가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이 새로운 발견이거나 기존의 지식을 새롭게 검증해 주는 결과들이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보다 새로운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는 속도가 빨라 해석할 시간을 미리 예약해 두어야 할 지경이다. 나름 기회가 온 것이다.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합당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고, 모르는 지식이 있다면 공부해서 알아낼 수 있는 정도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필요한 가설을 세울 수 있고, 실험을 디자인할 수 있으며, 손도 나름 좋아 단 몇 번의 가벼운 실험으로 뚝딱뚝딱 결과를 만들어 내고, 결과를 해석해 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사 과정 때 제대로 배웠던 것이 이럴 때 체험이 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런 기회가 오면 제대로 박사 학위를 소유하고 있다면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난 믿는다. 단 경험의 정도에 따라 속도가 조금 차이날 뿐, 방향은 같을 것이다. 중요한 건 기회와 기회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의 시간이다. 그렇다고 침묵을 잘 견뎌냈다고 해서 기회가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무엇도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저 하루하루 과학자답게 성실히 살아갈 뿐, 침묵의 시간에서나 기회가 왔을 때나 변함없이.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침묵의 시간을 견뎌내며 그 가운데서도 과학자답게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난 후학들에게 꼭 이야기를 해 줄것이다. 그 기간을 건너 뛰고 싶다면, 다른 걸 알아보라고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