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커피와 인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1. 4. 07:27

| 출근 길, 스타벅스에 들려서 그란데 카푸치노 하나 주문하려는데, 무려 열 명이나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줄 맨 끝에서 잠시 생각한 글을 두서없이 옮겨 본다. |


라떼에서 카푸치노로 갈아 탄 후, 커피를 좀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유와 거품의 비율이 다를 뿐, 동일한 양의 에스프레소가 들어감에도 라떼와 카푸치노는 다른 맛을 낸다. 어떤 이는 커피 맛을 ‘제대로’ 알려면 아무 것도 섞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우유와 거품 대신 뜨거운 물을 넣은 것이 아메리카노인데, 차이는 물이냐 우유냐 일뿐, 내재된 에스프레소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유 맛이 물 맛보다 강하여 에스프레소의 맛과 향을 더 가린다는 논리에는 동의하나, 난 ‘제대로’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다.


커피는 커피 원두를 볶아서 만들어 낸다. 볶는 과정에 따라서 다른 맛과 향을 낼 수 있고, 또 어디서 재배한 원두냐에 따라서도 다른 맛과 향을 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두 커피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관심이 있다. ‘제대로’ 된 커피의 맛?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결국 그 사람의 각인된 경험, 다시 말해 과거에 자신이 감동했던 그 커피 한 잔의 맛과 향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인 코너에 가보면 어떤 와인이 더 쓴지 더 단지 더 떫은지 도표가 나와 있다. 그러나 어떤 와인이 ‘제대로’ 된 와인이라고는 어딜 봐도 적혀 있지 않다. 비싼 가격의 와인이라고 해서 제대로 된 와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해서 싼 와인이라고 더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중간 값을 선정했다고 자신이 제대로 된 와인을 구입했다고 자신할 이유도 없다. 물론 트렌드는 있다.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나고 자신도 모르게 확인되지 않은 그 트렌드에 자신을 껴맞춘다. 그리고 왠지 맛있다고 해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맛과 향을 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관점을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지, 백인이나 흑인, 황인을 만드시지 않았다. 인종은 커피와도 같다. 하나님은 커피 나무를 만드셨지 아메리카노나 라떼, 카푸치노를 만드시지 않았다. 어떻게 자랐는지, 어디서 자랐는지, 어떻게 볶는지에 따라 다른 맛과 향을 내지만, 어느 커피가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자라왔는지에 따라 다른 기능을 하지만, 어느 인간이 ‘제대로’ 된 인간이라든가, 어느 인간이 하나님이 ‘제대로’ 창조하신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색 인종이 아닌 백인들이 다른 인종에 비해서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이다. 아메리카노가 라떼나 카푸치노보다 더 우월할 수 없다.


우리 역시 타인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을 억지로라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원래 인간이 선하거나 악하다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하거나, 역사적인 인간들의 만행을 근거로 들면서 그들의 주장을 귀납적으로 증명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해석일 뿐, 진리는 아니다. 진리에 대한 해석이 어떤 한 쪽으로 편향될 때, 그 해석은 악이 된다.


'제대로' 된 커피는 없다. '제대로' 된 인간도 없다. 그저 커피는 자신이 가진 커피의 맛과 향을 내면 되는 것이고, 우유나 거품이 섞였을 때도 다양하고 다채로운 맛과 향을 내면 되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그 어디나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엄청난 고난 속에 태어나고 죽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런 말이 경솔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맞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