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가면무도회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1. 25. 07:54

바쁘면서도 쫓기지 않을 수 있을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수반될 때다. 바로 순조로움이다. 그렇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더라도, 계획한대로 모든 일이 항상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충분히 쫓기지 않을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러나, 그런 순조로움은 살면서 아주 가끔씩 아주 잠깐 동안만 찾아올 뿐이다. 대부분의 바쁨은 크든 작든 한 번 꼬인 일이 만들어내는 나비효과에 기인한다. 실수 없는 인간 없고, 시간 위에 군림하는 인간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바쁨은 쫓김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바빠도 좋으니 쫓기기 싫다는 말이 멋스럽게 들릴 때가 있었다. 성령충만하면 바쁨도 초월하여 24시간 평안을 누리며 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 어릴적 교회에서는 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로님을 볼 수 있었다. 돈도 많이 벌고 헌금도 많이 하시며 사회에선 피라미드의 윗부분에 거하시는 장로님들의 모든 것을 초탈하신 것 같은 그 표정. 정말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비결을 물어봤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된다고 하셨다. 내가 어려서 그랬지 아마 성인이었다면 헌금 얘기도 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한동안 새벽기도도 빠짐없이 갔고, 방언을 하려고 노력도 해봤으며, 이해는 안되지만 성경도 많이 읽었다.


최대한 많이 그리고 미리 성령충만을 받아놓으면, 기도를 많이 해놓으면, 성경을 많이 읽어두면, 곧 생겨날 실수나 문제가 날 피해갈 줄 알았다. 감기도 걸리지 않고, 교통사고도 나지 않으며,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도 모두 초월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장로님들처럼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령충만을 철저하게 잘못 이해한 탓이었다. 나에게 있어 성령충만은 게임에서 나오는 것처럼 에너지를 모아두는 것과도 같은 개념이었던 셈이다. 성령충만 받으면 보이진 않지만 초능력자처럼 행동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역자들이나 중직자들은 초능력이란 단어 사용을 싫어한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표현하는 최종 결과물은 초능력과 다를 게 없는데, 그들은 초능력이란 단어 사용을 극구 반대한다. 뭔가 거룩함이 제거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난 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린 뭔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서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성육신의 의미를 곱씹는다. 성육신하셔서 우리 중 하나가 되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채고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이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함의 표현형일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장로님들의 거룩하고 초탈한듯한 표정은 가면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에겐 주일예배가 가면무도회였을 것이다. 나처럼 그들을 우러러보는 시선을 즐기며 가면 속에서 만족하며 쾌거를 부르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놓고 평일날 직장에 가면 가면을 벗고 결국 여느 일개의 세상인과 다를 바 없이 지낼 거면서 말이다.


요즘 너무 바쁘다. 쫓긴다. 마음에 여유가 사라진다. 짜증이 난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러나 이젠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겠다. 탈출구를 찾아 내게 주어진 이 현장을 져버리지 않겠다. 이 현장 한 가운데서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겠다. 지속하겠다.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할 장소는 거룩한 예배당이 아니라 바로 내가 속한 이 더럽게 바쁜 현장이기 때문이다. 내가 늘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고 있다면, 나의 존재가 곧 하나님나라이며 전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바쁜 현장 가운데 있는 하나님백성들이여, 모두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