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017년.
결코 확률 게임이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비율로 인생은 뜻밖의 일들로 채워진다. 지난 6월, 예정대로 3년 만에 아내가 조인했고, 우린 다시 셋이 됐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LA에서 함께 살게 될 줄은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런 배경 (학연, 지연, 혈연, 돈줄)도 없이 미국에서 각자 다른 전문 직업 (게다가 둘 다 아직 stable position이 아닌 trainee)을 유지하면서, 그것도 비자를 가진 외국인 부부가 아무런 도움 없이 아이까지 키우면서 같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들도 가장 살고 싶어하는, 겨울이 없는 서던 캘리포니아, 그 중심에 위치한 LA에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뚝딱 이루어진 것은 분명 가장 낮은 확률로 존재했던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었다. 이방인에 불과한 우리들의 손에 놓여진 카드는 제한되고 뻔한 몇 장밖에 없었다. 사실 작년 인디애나에서 아들 녀석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사 올 때조차도, 머지않아 아내가 채용될 곳으로 다시 이사할 각오를 가지고 왔었다 (물론 아내가 채용이 된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안 된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가족으로서 더 이상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내와 나, 둘 중 하나는 직업의 피라미드 선상에 놓인 줄을 좀 느슨하게 잡던지, 아예 놓던지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나여야만 했고, 그게 현실적으로 맞았다.
클리블랜드에서 처음으로 내리막길을 경험하고 견뎌냈던 3년, 싱글 대드로 미국에서 생존해야 했던 그 다음 3년, 그리고 다시 가족이 함께함을 연습했던 지난 6개월은 내게 묵직한 메시지를 하나 던져주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해서다. 생각해보면, 그저 때가 된 거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 생활 6년 반 동안 가치관의 변화를 겪어왔는데, 그 변화에 따라 나의 직장인으로서의 목표 또한 재설정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진정한 변화는 현실적인 영역에서의 변화를 동반하기 마련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는 깨달음은 헛될 뿐이다. 미국에 왜 왔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테다. 고급스런 가식을 차치한 진실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보면 이 대답은 목적어가 없다. 그러고 보면, 난 나름 성공했다.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말이다. 난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미국에 왔기 때문에, 헛된 꿈을 좇았기 때문에, 가면을 쓰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가식 없이, 내 모습을 좀 더 그대로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 덩달아 남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효과도 증진됐다. 머리로만 알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국 생활이 만들어준 혈관을 타고 드디어 손과 발로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내 나이 마흔 즈음에 이루어졌고, 난 감히 이 시기를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부르고 싶다.
게으름의 냄새 없이, 내가 가장 편안해 하는 상태에서 성취감도 느끼며, 창조된 인간에게 부여된 신성한 노동을 지속할 수 있는 직업이 나에게는 더 이상 아카데미 필드에서의 PI (Principal Investigator, 교수나 그룹리더, 보스 등등으로 불리며 자신의 실험실을 가지고 있으며 포닥, 대학원생, 연구원, 테크니션 등을 책임지는 위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이 필드 위에서 제대로 일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탁상공론에 그치거나 술 한잔으로 사라져버리는 그런 상념일 뿐이다. 그러나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 이미 수천 번은 더 했던 이 생각과 다시 마주하게 것은 의미가 다르다. 이번엔 결코 술 한잔 하면서 하소연을 하거나 땀 흘리며 육체를 혹사시키거나 해서 사라져버릴 것이 아니었다. 내 손과 발에, 그 동안 흐르지 않았던 따뜻한 피가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과 발이 따로 논 채 머리만으로 그 생각을 마주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계약이 2년 남았다. 2019년 가을에 내 계약은 끝이 난다. 현재로선 그 이후 나의 직업 전선에서의 향방은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다. 경험과 확률의 잣대로 본다면, 난 더 이상 같은 포지션에서 일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게 되더라도 난 살아남을 것이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지만, 이런 것들을 하나씩 냉철하게 따져보고 있자면 내 모습이 참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전신에 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은 별 겁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초점은 2년으로 모아진다. 2년간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과 창의력과 기술을 쏟아 부을 작정이다. 그리고 결과를 보겠다.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이언스에서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 마침 재미있는 발견도 했고 지지부진했던 프로젝트도 본 궤도에 오른 듯하다. 후회 없도록 치열하게 살아보겠다. 나의 2018-2019년도의 장기 플랜이다. 생각은 자꾸 그 이후로 나아가지만 일부러 멀리 가진 않겠다. 그것은 내겐 머리만 따로 노는 과거로의 회귀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그날처럼 사는 과학자가 되어 보겠다. 2년 뒤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든 종말론적 신앙관은 그대로 유지되며 더욱 나의 중심에 놓이게 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나를 맞추겠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생,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 인생이지만, 이젠 그래도 조금은 짙은 선이 보이는 듯하다. 여전히 목적지는 모르지만, 내게 일용할 양식을 늘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음이 참 감사하다. 2017년의 마지막, 그분을 신뢰함으로 난 또 순례자의 길을 떠난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진 자에겐 정착이 아닌 떠남이 곧 익숙함이다.
페친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고 나눕시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 그분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