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진정한 나눔의 시작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2. 6. 08:16

진정한 나눔의 시작.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울고 함께 속상해하며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모자랐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마음 문을 여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좀 더 웃고 떠드는 시간을 가진다면 언젠가는 속에 있는 진실된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전제를 빠뜨린 얘기다. 즉, 함께 보낼 시간이 충분하다는 전제가 빠졌다.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요즘 시대는 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렵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금수저나 어떤 특별한 기득권을 가지지 않는 대부분의 서민들인 우리들은 생계에 쫓긴다. 밥벌어 먹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열정이 손에 쥐어지는 월급봉투의 두께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벌써 오래전부터 은밀하고도 속이 무진장 상하게 공인된 일이다. 우린 쫓기며 살고 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래도 일요일날 교회로 나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위로를 받기 위해서, 어떤 이는 안 나오면 벌이나 저주를 받을까봐, 어떤 이는 습관처럼, 어떤 이는 밥벌이로, 또 어떤 이는 나와야만 하는 어떤 의무나 책임 때문에 나온다. 각자 모양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교회에 나와서 한 공동체를 이룬다.


마음을 육적인 것에 두지 말고 신령한 영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목사의 설교에 뜨끔하기도 하지만, 그 설교하는 목사도 자신의 월급날 통장의 잔고를 보며 한탄한다.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은 그 거룩한 배려 따위로 만난 교인들에겐 속에 있는 고민을 감추고 세상 생활에서 익숙해진 웃음을 짓는다. 겉도는 얘기를 한다. 웃고 떠든다. 그러나 눈은 자꾸 스마트폰이나 시계로 간다. 집에 가도 뭐 특별한 일이 없지만, 그냥 예배 끝났으니 집에 가고 싶다. 의식 하나 치렀으니 그나마 죄책감은 덜은 셈이기 때문이다.


고백공동체를 꿈꾼다. 거기엔 신뢰가 바탕이 된다. 객관적인 신뢰할 만한 수치를 가진 사람이나 공동체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를 살길 원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수치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속에 있는 말을 하자. 진정성이 느껴질 수 있다면, 공감이 될 것이 분명하고, 그 사람의 말이 저절로 마음에 담긴다. 자꾸 생각이 난다. 기도가 된다. 궁금해진다. 관심이 가져진다. 그러는 사이 공동체로 하나가 되어간다.


스마일 코스프레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던져 버리자. 위선의 가면을 던져 버리자. 자신의 수치와 자존심도 넘어서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그대로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어떻게 진심어린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위로를 받지 못하는 건 스스로가 먼저 솔직하지 못해서일 수 있다. 어렵지만 노력하자. 신비감을 떨쳐 버리자. 베일을 벗어 버리자.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던 것처럼 교회공동체도 그와 닮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나눔의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