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Terminator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3. 1. 16:09

Terminator.


전문가 (아마추어기 아닌 프로) 대열에 들어섰다면, 조금만 창의성이 있어도 멋진 일을 계획하고 시작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주위에서 천재라는 소리도 곧잘 듣곤 한다. 웬만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는 사람도 그 동안 여러 명 만나봤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흥분되는 것은 물론이며, 뭔가 큰 일을 해낼 것 같은 기대감에 벅차 오를 때도 많다. 그런데 그 좋은 아이디어들이 대부분은 실현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어떤 일이 시작되어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반드시 그 일은 먼저 마무리되어야 한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만났던, 창의적이라고 알려진 똑똑한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그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거나, 시작했어도 끝내지 못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끝까지 책임지고 멋지게 마무리 짓는 똑똑이는 거의 못 만나봤다. 언뜻 보면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겠지만, 우습게도 이게 현실이다.


아무리 기발하고 훌륭한 생각도 계획될 때와는 달리 그 일이 실제 진행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을 만나게 되는 법이다. 사실 이런 과정 중에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야말로 전문가로서 굉장히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프로는 위기 때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그 문제 덕분에 처음의 그 기발한 아이디어도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일의 결국이 허무함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일을 제안하고 시작했던 그 똑똑이는 금새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다른 일을 시작해 버린다. 저질러놓은 일의 뒷수습은 별 관심 없다. 여기서 알 까놓고 저기서 알 까놓는 일만 해대는 것이다. 책임감이란 건 적어도 내가 경험한 전문가의 현장에서는 천재에게 그리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카데미에서 프로로 선 지 올해가 10년째다. 기존에 가졌던 직업적인 꿈은 내년 여름까지만 유효하도록 유통기한을 내 스스로 정했다. 지금은 뭔가 대박이 터질법한 근사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진행해 온 프로젝트들을 멋지게 논문으로 마무리하는 시기다. 내가 가진 전문 지식과 제법 쓸만한 내 손과 기술을 모두 동원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리라. 똑똑한 Starter가 아닌 근성 있는 Terminator로 끝까지 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