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회복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4. 5. 07:58


회복.


깨지고 부서져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도 각인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머리와 가슴을 울리는 통찰과, 처절하게 한이 맺힐 정도로 마음에 사무친 기억도 별 수 없었다. 비슷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난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내가 익숙한 대로 몸을 움직였다.


분열되어 여러 조각으로 흩어진 나의 모습 중에 진정한 내 모습은 바로 '각인된 실체'였다. 각인은 가장 상위에 속하여 몸을 관장한다. 각인에 비하면 아무리 깊은 한과 통찰로 얻어낸 깨달음도 이물질에 불과하다. 이미 이성까지도 통제한 각인은 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깨달음이란 이물질을 공격하고 밀쳐낸다. 일종의 면역반응인 것이다.


악은 어쩌면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체제 속에, 아니 체제 그 자체에 녹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누가 경찰이고 범인인지,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함부로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우리가 처한 이 세상이 아닌가 싶다.


깨달음이 각인의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우리가 겪어내야 할 수많은 전투/전쟁은 소위 영적 전쟁에 다름 아니다. 이는 복음을 살아내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허다하게 많은 좋은 가르침들과 교훈들, 그로 인해 간직하게 된 깨달음들이 모두 고스란히 소중하게 간직되기만 한 채 한 번도 써먹질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겁한 게으름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배후에는 원죄의 흔적인 자기애가 살아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뜻하지 않게 일상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소중한 만남을 통해 찾아오는 귀한 권면과 훈계, 위로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개인이 아닌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이유도 조금은 알 듯하다. 나약해서 넘어지는 개인을 붙잡아줄 공동체. 은혜와 축복이 고이는 곳이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는 공동체. 희망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회복을 가져온다.


**수잔 누님이 사주신 맛있는 점심식사 후, 권해주신대로 Balboa Peninsula에서 Harbor Cruise 타고 탁 트인 태평양 바다를 맛보다. 환대해 주신 수잔 누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