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에레츠학당 글쓰기 네 번째 과제: 일기 2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4. 20. 04:54

2018년 4월 12일 목요일. 맑음.


빛의 축제.


오늘도 세상은 내게 너무나도 눈부시다. 도시의 깊숙한 어두움은 물론 내 안에 침전된 회한까지도 다 씻어내려는 듯,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한낮을 준비하며 때이른 더위를 벼르고 있다. 4월의 캘리포니아, 한낮의 기온은 벌써 화씨 90도를 오르내린다. 겨울이 거세된 이곳엔 태양이 그 빈자리를 빈틈없이 메워버렸다.


직업병으로 시작된 알러지가 심해져 눈까지 영향이 미친 것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특히나 내게 캘리포니아의 빛은 더욱 눈부시다. 요 며칠 새 기온이 급상승하는 바람에 내 눈과 코는 그들을 영접하느라 정신이 없다. 끈적한 눈물과 콧물이 앞을 가린다. 그래도 빛의 축제는 시작되었다. 눈이 부셔 눈을 잘 뜰 수가 없어도, 코가 막혀 연거푸 코를 풀고 재채기를 해대면서도, 난 거절하지 않고, 내 안에 갇히지 않고, 빛의 축제에 당당히 참여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축제, 스스로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그 누구라도 언제나 정식으로 초대받은 자인 것이다. 난 오늘도 기쁨으로 그 초대에 응한다. 빛을 영접하러 밖을 나선다.


반팔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하얗게 칠해진 건물의 벽들은 서로 빛을 반사하느라 분주하고, 주위는 온통 빛의 향연이다. 길을 가득 메운, 등교하는 아이들이 신은 새하얗고 조그만 양말에서도 동일한 빛이 반사된다. 그들이 걷는 작은 걸음걸이마다 빛이 사방에 뿌려진다. 어린아이들이야말로 임명되지 않았을 뿐, 실로 빛의 전도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아이들 앞에 설 때 정화되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그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들의 힘을 알아채지 못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아이들을 보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사람이 현재를 알아채고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창조주의 설계일까, 아니면 이것 또한 죄의 결과일까? 어쨌거나 상관없다. 아이들을 통해 배울 수만 있다면, 아이들로 인하여 겸손하고 낮은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것 또한 창조주의 뜻 아니겠는가.


아들의 작은 손을 잡고 길을 건너, 등교 시간 대부분의 아이들이 오가는 오크 스트릿으로 진입한다. 사우스 패서디나는 대부분이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초등학교가 셋, 중학교가 하나, 고등학교도 하나밖에 없는 아주 작은 도시인데, 공교롭게도 고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이 길 위에 모두 몰려있다. 덕분에 거의 매일 아침 오크 스트릿에 오르면, 책가방을 멘 학생들에 둘러싸여, 본의 아니게 난 또 다시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지난 날의 피로도 이 빛이 가득한 길 위에서는 어느새 힘을 잃고 만다. 빛은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문으로 들어가던 아들이 뒤를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어준다. 지치고 고단하여 얼어붙었던 마음의 문이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샘솟듯 사랑이 벅차 오른다. 그 순간만은 나도 모르게 한없이 베풀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나를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해주는 아들. 나는 빛의 아이 앞에서 오늘도 경건한 마음이 되어 겸손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행복해야만 하는,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오늘'이 시작된 것이다. 빛과 사랑,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전철역에 가면 홈리스들이나 그들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은 보통 어둡고 습한 곳에 몰린다. 비나 강한 햇빛도 막아주며 넓은 벤치도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그들이 밤을 보내기에는 전철역이 제격인 것이다. 전철역 구석구석까지 비출 만큼 빛이 가득한데,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어둡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구역질 날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그들은 빛의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초대를 거절한 것일까? 


최근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 중 레위기를 읽고, 두 단어가 마음에 남았다. '거룩'과 '희년'이다. 이 둘의 공통된 키워드 중 하나는 '가난한 자'이다. 수 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있었을 가난한 자들과, 현재의 나완 별 상관없이 머릿속에 실루엣처럼 남아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막연한 인상들이 전철역에서 만난 홈리스들을 보면 단박에 깨어진다. 시각과 후각, 청각을 통해 직접 느껴지는 가난한 자들의 살아있는 현장은 내가 읽은 성경과 저 높은 곳을 향한 서적들을 모두 땅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내 안에 상주하고 있던 혐오와 배제를 끄집어낸다. 자, 내가 깨닫고 회개하고 기뻐했던 어제밤의 그 감동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현장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은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고결한 척하며 피둥피둥해진 영혼의 비계 덩어리만 증가시킬 뿐이다. 삶과 신앙이 일치된 삶을 살아내는 것은 우리 안에 먼저 각인된 배제와 혐오 같은 사탄적인 생각과 감정과의 지난한 싸움일지도 모른다. 영적싸움이란 오히려 철저히 육신적이며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예수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들과 함께 하며, 공생애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성경을 책상에서 읽기만 해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복음을 살아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손과 발로써 실재하는 죄와 악을 건드리고 밟고 살아남는 일이다. 나의 귀찮음과 고통과 고난을 거치지 않는 하나님나라란, 책 속에나 있는 취미생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결코 취미생활이 아니다.


재정이 하도 풍족하여, 이번엔 어떤 행사를 하여 돈을 쓸지를 고민하는 듯한 교회에는 더 이상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땀 흘려 번 돈을 내고 싶지 않았다. 헌금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거라면,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 교회에 모든 헌금을 다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결정은 제왕적 목회현장이 아직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교회를 돕고 싶은 마음이 내겐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목사의 설교에서는 영혼에 대한 사랑은 물론 거룩이나 희년에 대한 건덕지도 느낄 수가 없다. 대신, 나에게 허락된 수많은 만남 중에 마음이 담기는 이웃을 돕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헌금이라 생각했다. 직급이 올라 덩달아 조금 오른 월급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일, 자신이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남에게 주는 이 앞에선 아직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주고받는 관계가 서로 기쁘고 모두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거룩한 삶이요 희년의 일상화 아니겠는가. 빛의 축제에 너도 나도 정식으로 초대되었음을 알고 모두 손잡고 나와 빛을 영접하는 일, 조금만 도우면 함께 나올 수 있는 시람들을 도우며 그들과 함께 나오는 일, 내 남은 일생도 이 사역에 모두 바치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