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제한거리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4. 25. 15:04

제한거리.


원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타인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이를테면 배우자와 아이들)이 가장 큰 제한거리로 여겨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린 그때, 마치 우리의 행복도 제한 받는 것처럼 여기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여긴다. 동시에 그들은 그 순간 우리와 가장 먼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살면서 어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면, 늘 이러한 제한거리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변명거리가 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사라져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제서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비로소 자유를 다시 쟁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제거할지 말지 고민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행복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럼, 계속해서 참아야만 하는 걸까? 행복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구름 속의 떡일 뿐인 것일까? 행복은 그저 동화 속에나 나오는 허상일 뿐일까?


위의 두 단락에 적힌 생각의 흐름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모두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은 채, 행복은 나만 추구하여 얻어낼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바로 이름하여 '죄악의 공간'이 되겠다. 이 생각에서 빠져 나오는 좋은 소식이 여기 있다. 바로, 나 역시 타인에겐 타인이므로 타인의 삶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순간, 나만 한 가운데 있고 (주연), 나 이외의 모든 것은 그저 객체 (조연)일 뿐인 그 죄악의 공간이, 수많은 주체들이 동일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회복된 공간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곳은 비로소 공동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제한거리들은 결코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혹 그것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곧 나도 사라지는 날이다. 우리 모두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제한거리들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부인할 수도 없이 이미 타인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그들을 제한거리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로부터 속은 것과 다름 없다. 그 속이는 자가 체제화되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길들이는 것이다. 체제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좋은 소식은 반드시 외부로부터 주어져야만 하는 이유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나 자신을 모든 가치와 선악의 판단의 중심 잣대로 삼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행위. 타인을 '나'와 동일한 주체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행위.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는 행위. 이런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 자신의 왕국 안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 위로부터 오는 생각이어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노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유익만 따지고 남들을 차별하는 모습들을 본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에는 교만한 자도 있고 자기만 아는 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나님나라도 지금 이 중간시대와 마찬가지로 죄와 악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죄악의 뚜렷한 표현형인 교만이 하나님나라 안에 어찌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쓰잘데기 없는 구원의 확신 타령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교만하지 않기 위한 회개의 몸부림, 타인을,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의 생각 속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쉽게도 스스로 자처한 제한거리일 뿐이다. 왕의 초대를 거부했거나, 얼떨결에 왕의 잔치에 오게 되었으나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이를 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