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파문.
잔잔한 물에 돌 하나가 던져지면 파문을 일으킨다. 잔잔함이 평화였다면, 그 돌 하나는 평화를 파괴한 주범이 된다. 그러나 그 잔잔함이 평화가 아니었다면, 그 돌 하나는 평화 파괴자의 누명을 벗게 된다. 잔잔하다고해서 모두 평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썩어가는 고인 물도 잔잔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그 돌의 의미를 묻기 전, 기존의 잔잔함의 의미를 먼저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잔잔함은 과연 평화였는가? 돌이 던져지기 전 우린 정말 평화를 누리고 있었는가?
우린 관성의 동물이라 익숙함을 본능적으로 찾고 거기에 길들여진다. 그것은 곧 우리의 이성을 통하지 않고도 법과 규범이 되며, 우리의 가치판단의 근거로 자리잡는다. 평화라는 개념 역시 그 체제가 기준이 된다. 체제의 흐름과 같은지, 그 흐름에 반하는지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라는 개념이 어느 하나의 체제 속에서만 유효한 것이라면, 그 평화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될 수 없다. 평화는 안과 밖, 그 어떤 곳에서도 유효한, 우주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최상위의 개념 중 하나이고,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린 그 평화를 평화라고 부르지 않고 집단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고인 물은 스스로 갇힌 집단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대신, 평화는 언제나 새로운 유입과 유출이 있어 썩지 않고 흐른다. 잔잔함이 평화를 상징한다면, 그 잔잔함은 정체를 뜻하는 것이 아닌 고요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평화는 갇혀 있어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흐르면서도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흐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기준은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
그러므로 잔잔함에 파문을 일으킨 돌 하나의 의미 역시 그 잔잔함의 내부의 기준이 아닌 외부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부의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분별력이라면, 우린 우리가 속한 단체나 사회 속에 흐르거나 고여있던 기존의 잔잔함이 깨어질 때, 그것이 그저 썩든 말든 상관없이 어쨌거나 익숙해진 체제를 파괴하려는 반동세력인지, 그 체제에 물꼬를 틀어 내부와 외부의 압력을 맞추는 평형상태로 가기 위한 단초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합리적 의심이 이런 돌 하나가 될 때가 많다. 보통 이런 의심은 기존에 있던 관행적인 체계에 대한 흠집에서부터 생겨난다. 중요한 건 바로 이 때다. 당신은 이 돌 하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쨌거나 아무 탈 없었으니 관행도 괜찮다고 치고 그대로 묻어갈 작정인가? 아니면, 외부의 시선을 수용하고 관행이 소수 집단의 이기적인 유익을 배후에 둔 관행이었음을 인정하고 고쳐나갈 마음이 있는가? 종북이나 좌파나 마녀로 규정하고 처형할 것인가? 아니면, 개혁의 시작으로 여길 것인가? 피하거나 미루지 말고, 스스로 책임감 있게 판단하려고 노력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