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파괴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5. 12. 08:58


파괴.


선은 창조를 행하고, 악은 파괴를 일삼는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는 알을 깨뜨리고 나오는 새를 비유로 들며,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때, 파괴의 목적은 생명의 연속에 있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생명의 연속이 끊임없는 창조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알의 파괴는 창조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체는 알이 아니라 새다. 알의 존재부터가 새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생명의 연속은 창조의 본질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파괴를 포함한다. 어쩌면 연속적인 창조로 이루어진 생명의 연속을 위해선 파괴가 필수적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우리는 알을 깨뜨리고 나오는 새를 볼 때 창조와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하지, 파괴되는 알의 처참함에 공감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린 이미 철학적인 사유를 행하지 않고도 그 결과에 본능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바로 창조는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신체의 발달과정에서도 이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손가락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손바닥과 손가락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의 뭉뚱그려진 살덩어리였다. 그러나 배아 시기의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사이의 세포들이 죽어나간다. 손가락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손가락이 손가락으로 보일 수 있는 건 손가락 사이사이에 꽉 채워져 있던 세포들이 그 살덩어리들이 모두 말끔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파괴 역시 손가락의 창조를 위한 것이고, 발달과정이라는 것 자체가 생명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린 그 파괴에 분노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손가락의 창조 과정에 놀라워할 뿐이다. 살리는 것이 창조이자 선이라고 할 때, 이러한 파괴는 모두 창조를 위한 도구가 된다.


반면, 파괴를 위한 파괴가 있다. 창조의 도구로서의 파괴가 아닌 파괴 그 자체를 위한 파괴. 이때 파괴는 악의 다른 이름이 된다. 파괴는 악이다. 놀랍게도 이 악의 화신인 파괴 역시 자신의 목적인 파괴를 달성하기 위해 창조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거짓’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 천사의 가면을 한 악마, 등등의 쉬운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은 표면적으로 아름다우며 선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악을 마주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분별력이다. 창조와 파괴, 선과 악이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사용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이 복잡한 현상과 그의 변화무쌍한 발전 과정을 유한한 몸을 가진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순 없다.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언젠간 부분적이라도 속게 되어 있다. 인간의 분별력은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개념은 깊숙한 본질을 꿰뚫는다.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된 인간, 그러나 그 분별의 기준이 인간 스스로의 이익이기에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인간 세상에서는 수많은 선과 악이 정의되고 무분별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은 선과 악의 분별조차도 힘의 논리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사사기의 마지막 절처럼 인간 세상은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왕의 임재와 통치. 이것이 답이다. 선과 악의 기준이 다시 유일한 왕의 기준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는 곧 회복이다. 하나님나라의 도래. 악의 존재가 사라지는 그날.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