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지경이 넓혀지다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5. 13. 04:52

지경이 넓혀지다.


클리블랜드에 살 때였다. 3년 반을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 주민의 99퍼센트는 흑인이었다. 그 중 절반이 넘는 분들은 적어도 50대 이상이셨다. 일부러 그 아파트를 고른 건 아니었다. 그 정보를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다른 아파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 아파트에는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일하고 계신 한국 분의 지인이 살고 계셨고, 그 분이 마침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오기 2주 전쯤 한국으로 돌아가신다는 거였다. 그 분은 차량과 아파트 물품들을 처리해야만 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가장 먼저 필요할 예정이었다. 18만 마일 달린 혼다 시빅을 3000달러에, 데스크탑 컴퓨터, 식탁, 의자, 소파 포함 아파트 물품 전체를 1000달러에 인수받기로 했다. 결과적으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였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그 분이 스쳐 지나가면서 흑인들이 아파트에 많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 난 미국이라면 그게 당연한 거라 여겼기 때문인지 개의치 않았었다. 그러나 그 아파트에 실제로 살기 시작하면서 집집마다 우리 가정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이 거의 흑인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나선 왠지모를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그 아파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동네에는 흑인들이 소유한 집들이 대다수였다. 미국에서 여러 군데를 살아 본 사람이라면, 흑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와 백인들이 밀집된 동네의 분위기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한 번에 느낄 수 있을 만큼 조금은 낙후되고 조금은 위험스런 동네에서 3년 반을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처음 각인된 미국이었다.


차가 한 대밖에 없었으므로 그 당시 일을 하지 않았던 아내는, 내가 차를 타고 출근을 해버리면 집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난 용기를 내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침 아파트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전철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클리블랜드 클리닉까지는 그 전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중간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었다. 전철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여느 출퇴근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버스는 달랐다. 100% 흑인들이 타고 있었다.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크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버스를 타면 그들이 날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흠칫 놀라기도 했었지만, 겉으로 표는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3년 반 동안 아무런 일이 생기진 않았다. 나중엔 익숙해졌고, 비슷한 시간 같은 버스를 타는 그들을 보면 눈짓이나 간단한 말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을 풍문으로만 들어 두려워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인디애나에서 1년 반을 살 때는 또 달랐다. 거기는 백인들이 95퍼센트 이상이었다.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선 클래스 당 아시안이 한 두 명밖에 없었다. 내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에서 유일한 아시안이었다. 그리고 흑인은 없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흑인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인디애나로 와선 백인들에 둘러싸여 살게 되니 내게 있어선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였다. 백인들이 많은 곳에 오니 왠지 안전함이 느껴졌고, 왠지 고급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왠지 나도 품격이 높아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마 나만 그런 기분이 든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별을 느낀 건 오히려 인디애나에서였다. 눈에 띄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겉으로 아주 친절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넘지 못할 장벽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었다. 흑인들과 살 땐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불쾌했다.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친절은 동등한 인격적인 대우가 아니라, 심하게 표현해서, 종이나 애완견에게 하는 일방적인 그들의 아량인 듯했다. 그들은 만약 자기들이 자기 맘대로 정한 아량의 마지노선을 우리가 넘게 되게 되면, 본색을 드러내어 당연한 듯 우리의 상위에 위치하여 우리들을 가르치려 들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언제든지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에 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그때 이후론 백인들의 친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게 되었다. 나름대로 상처를 입게 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로 얼떨결에 이사온 지 1년 반이 지났다. 여기에는 클리블랜드나 인디애나에서 좀처럼 만나볼 수 없었던 히스패닉을 많이 접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그나마 인종이 고르게 분포해 있는데, 백인이 30%, 아시안이 30%, 그리고 히스패닉이 30% 정도라고 한다. 도시에 따라서 아시안이 70%가 넘는 곳도 존재하고, 히스패닉이 절반을 넘는 곳도 존재한다. 그러나 백인이 우세한 도시는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흑인 또한 클리블랜드에서보다 많이 만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론 세 개의 주 (오하이오, 인디애나, 캘리포니아)에 살아보면서 다양한 인종에 노출되어 보았고, 그들의 삶의 패턴이나 양식을 그나마 피부로 느끼며 체험할 수 있었다. 한국에 살 땐 결코 알지도 느끼지도 못했을 중요한 경험일 것이다. 미국에서 7년 가까이 많은 인종과 살아본 이 경험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복음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해석과 적용조차도 재검하게 만들었다. 지경이 넓어지는 만큼 더욱 풍성해짐을 느낀다. 처음에 잘못 각인된 두려움과 공포는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하나씩 깨달아나갈 때마다 나의 작은 세계가 파괴되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간다.


다양성의 존재를 체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어떤 철학이나 인문 사회학적인 사유를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는 것을 안다. 더 앞서 있는 선배들의 경험과 가르침을 배워가며 나보다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꼰대가 되지 않으면서 함께 가는 멋진 인간이 되고 싶다. 비록 미국에 와서 여러 꿈이 깨어졌지만, 인간으로서 더 크고 깊은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좀 더 철이 들고 성숙해져서, 멋진 성품의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