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후반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6. 4. 07:36

후반전.


내 삶을 거의 장악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무렵, 내 눈은 내 손에 쥐어진 것들이 아닌 내 손에 쥐어지지 않은 무한한 것들에 머물렀다. 우습게도 내게 있어 '장악'이란 곧 부족함과 불만족을 의미했다.


무한을 장악할 수는 없다. 무한은 장악하는 대상이 아니다. 무한은 신비일 뿐이다. 그러나 그 무한이 유한으로 보일 때가 있다. 보이는 것들에만 치중할 때다. 피라미드에 갇혀 그 꼭대기만을 쳐다볼 때다.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꼭대기가 내 욕심으로 가득 찰 때면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법이다. 이럴 땐 확률적인 계산은 중요하지 않다. 객관적인 수치들은 모두 나를 빗겨갈 것만 같다. 언젠가 나도 날개를 달고 저 위로 수직 상승할 날이 올 것만 같은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오른다. 금방 터져버릴 풍선처럼 말이다.


이런 순간을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맞이할 테지만, 이것이 반복된다면, 게다가 그것을 스스로 희망 고문하듯 반복시킨다면, 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그 사람의 내면 세계의 붕괴와 곧 이어질지도 모르는 외면 세계의 붕괴 역시 우려할 것이다.


삶이 무한이라면 삶 또한 장악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랬다간 언젠가의 나처럼 부족함과 불만족에 지배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다. 삶은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겐 과거가 있고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 패턴이란 것을 파악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만, 예측은 확률의 다른 말일 뿐, 무한히 누적된 표본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방향은 결코 '알 수 있음'으로 수렴하지 못한다. 인생은 '알 수 없음'으로 수렴하게 되어 있다. 아니, 인생 자체가 '알 수 없음'일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인생을 탐험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굳이 어느 곳에 정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굳이 피라미드 시스템에 스스로를 가두어 옥죄일 필요도 없다. 정착과 세력 확장은 '탐험'이 아닌 '장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전의 키워드는 '탐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반전에서 '장악'을 위해 애썼다면, 이젠 그것들을 놓아주자. 흘려 보내자. 아쉬운 미련은 신비 탐험의 밑거름으로 삼자. 속도에 치중했던 과거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풍성함을 찾아 누리는 쪽으로 방향을 두자. 내 인생의 후반전을 전반전의 연장전으로 만들지 말자. 빠르거나 높은 인생이 아닌, 풍성하고 꽉찬 인생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