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저항.
노동으로 합당한 보상을 기대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어쩌면 더 중요한 보상은 노동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일을 통한 합당한 보상은 덤이 된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별 의미없어 보이고 아무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실제론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잃어보지 않고 깨닫는 것이 은혜라면, 그 깨달음을 적용하는 것은 지혜다. 일상을 잃어보지 않고 그 가운데서 소소한 행복과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지혜있는 자들의 몫일 테다.
어떤 이는 ‘일상’이라고 하면 동네에서 떠드는 아이들 소리, 손잡고 산책하는 노부부, 그 사이를 슝 지나가는 자동차의 경적소리, 그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변치 않는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등등의 파스텔톤의 시적인 상상을 하고 자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관조하는 행위처럼 여기곤 하는데, 알고보면 실제 일상은 대부분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쉬는 시간만이 일상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땀흘려 일하는 시간이 오히려 일상의 주된 부분이다.
내가 수고해서 얻은 열매들을 볼 때나, 그 열매로 나와 내 가족이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며 만족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듯, 열매는 항상 내가 흘린 땀의 양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인생이 열매 있고 없음에 따라 행복과 만족이 결정된다면, 거기엔 우리들이 (특히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참 감사’가 낄 자리는 사라진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신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타인의 땀을 착취하여 자신의 열매만을 대량생산해내는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의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며, 정직한 땀은 한낱 어리석인 일로 전락해버린다. 행복과 만족은 어느새 피라미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참 감사’를 생각해본다. 피라미드 체제 안에 갇혀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면서 과연 ‘참 감사’를 말할 수 있을까? 그 피라미드는 어쩌면 합당한 보상이 아닌 ‘덤’을 위한 것이 아닐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란, 피라미드 체제 안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지만, 삶의 원리만큼은 구별하여 살아내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저항하여 거스르지 않으면서 ‘복’이나 ‘감사’를 운운하는 이들을 과연 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