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기형적 꼰대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8. 3. 09:26

기형적 꼰대.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오른쪽 사람들을 대할 때 고리타분하게 느끼거나, 아직도 깨닫지 못해서 순진한 우물 안에 갇혀 있는 멍청이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도 예전엔 그랬다며 우쭐대기도 하면서 소위 꼰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왼쪽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땐, 좋게 말해 용감하고 나쁘게 말해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강하다.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암묵적인 선이 존재해왔고, 그 선이 가져다주는 익숙한 평화에 나름 길들여져 있었는데, 그 왼쪽에 있는 사람이 난데없이 등장하여 그 선을 넘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아무도 감히 넘어서지 못한 선을 경솔하게 그 사람이 (지 까짓 게 뭔데??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에 대해, 보통 이 오른쪽의 사람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스스로는 잘 파악하기 힘들어한다. 사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의 얘기들이고, 언제나 정답이 주어져있는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스스로 할 줄 아는 생각도 그만큼 좁아져 있었다. 다시 말해,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정당성과 객관적 위치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그 충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들은 보통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듣게 되는데, 알고보니 이미 그런 충격을 받았던 여러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선배라는 작자들이 가관이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오른쪽의 사람인 경우 자기만의 강한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라간다. 그들은 자신들 영역 밖의 일들에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마치 금기시되어 있는 것 같은 문화에 길들여져왔기 때문이다.)


이 선배라는 작자들이 하는 짓이란 불분명했던 선을 확실히 그어주는 것이다. 이 위험천만한 행동엔 많은 주관적이고 위선적이며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견해가 들어가기 일쑤다. 말로는 후배들의 방황을 도와주고자 그렇게 했다 하지만, 실제론 자기가 마음에 드는 주장을 공식화하고 합리화하여 마치 그 생각이 진리이고 그 생각을 따르고 지키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는 불안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꼬드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던 행위와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그들은 본의 아니게 우상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적어도 상대적으로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묻고 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현재 좌표를 점점 알아나가게 되고, 진리인 줄 알았던 많은 것들이 그저 여러 갈래의 주장이나 해석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첨부터 뜻하진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론 지경이 넓혀지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에서 새로운 세상에 노출되기를 두려워하고 계속 자기 안위나 구하며 peacekeeper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peacemaker 를 말씀하셨다. peacekeeper 가 아니다) 스스로 의문을 갖고 묻고 따지며 답해나가는 행위 자체가 결핍되어 있다. 딴엔 공동체적이라 믿고 있지만, 개인이 거세된 공동체는 참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더 큰 개인일 뿐이다.


그들에게 말해주자.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의문을 가지라고. 갈급하게 그 답을 찾기에 치열하라고. 이단이나 삼단은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를 금기시하여 막는 세력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그 터무니없이 소극적이고 가련한 생각으로 수호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것들보다 훨씬 큰 분이라고. 경험도 해보지 않고 처음부터 차단된 물에서 나온 기형적인 꼰대가 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