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여짐
받아들여짐.
누군가는 상대방을 찬양하거나 높이는 것을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육신을 가지지 않는 신을 향한 사랑, 그것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사랑도 결국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표현으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에, 단지 신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온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신을 향한 사랑의 표현도 그러할진대, 같은 육신의 제약을 받는 인간들끼리의 사랑은 더더욱 그러하다. 상대방의 장점만을 부각시켜 그 사람을 칭송하는 행위, 이를테면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굉장하다거나 최고라는 표현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쌍방간의 사랑은 유지될 수가 없다.
장점을 인정받는 것은 인정받길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이자,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졌다는 자신의 은밀한 작전의 성공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 번에 강한 아드레날린의 상승을 동반한 쾌락과 유희를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나의 장점을 칭송하는 누군가 덕분에 구름 위로 붕 뜨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오래가는 사랑의 방점은 장점에 있지 않고 단점에 있다.
우린 모두 완전하지 않고 부족한, 언제나 ‘Under Construction’ 상태에 영원히 멈춘 존재들이다. 타인에게 장점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보여지는 것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꽃은 시들고 잎이 마르는 자연의 이치처럼 그 연출된 쾌락의 순간은 금새 사라지고, 거울 앞에 선 솔직한 자아 앞에 우린 어김없이 서게 된다. 그 혼자만의 시간. 어쩌면 누군가에겐 인생의 심연에 봉착하게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강하다.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 가운데서도 빛이 되어 함께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공개된 적 없는 무수한 단점들의 집합체인 자신의 실체에 절망과 좌절로 연명하고 있을 때, 사랑은 바로 그 옆에 다가와 힘이 되어준다. 받아들여지는 것.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 이 둘은 하나다.
그렇다. 사랑받는 것은 받아들여졌다는 말과 같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사랑받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를 거꾸로 적용하자면, 사랑하는 행위는 곧 받아들이는 행위가 된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과 감성을 모두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이다. 이해를 넘어서고 일희일비에 치우치지 않는 행위.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은 용서를 포함한다. 누군가를 받아들이거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꼭 거쳐야만 하는 단계가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수정되어야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초월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개념이 바로 사랑이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세레나데의 사랑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철부지들을 본다. 그들 사이엔 찌릿찌릿한 아드레날린의 상승곡선이 맨눈에도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서로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상대방의 장점에 매료되어 있을 그 황홀한 순간도 마음껏 만끽해야 하겠지만, 그 불타오르는 감정이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