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나쁜 토양의 지표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8. 21. 03:46

나쁜 토양의 지표.


생물학적인 결과를 해석할 땐 유전적인 요인과 함께 환경적인 요인을 고려합니다. 예를 들어, 암세포가 생겼다면, 그 암세포 내부에서 발생했을 유전자 변이와 함께 그 암세포가 생겨난 주위의 환경을 생각하는 거지요. 작게는 그 세포와 인접한 다른 세포들을 생각할 수 있고, 크게는 그 세포가 위치한 조직, 더 크게는 개체의 상태, 그리고 원인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인 원인까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이미 변이된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암세포가 생겨났다면, 환경적인 요인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요.


백혈병과도 같은 혈액암의 발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작동합니다. 밝혀진 거의 모든 혈액암의 원인은 어떤 특정 염색체의 치환 등을 포함한 유전자의 변이입니다. 그물망처럼 얽힌 원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최종적으로 어떤 정상세포 내부에 유전자 변이가 생겨나서 암세포로 전환되는 거지요. 즉 사회적 원인을 포함하여 환경적인 요인이 질병의 발단으로 차후에 규명이 된다 하더라도 결국 혈액암의 시작은 유전자 변이가 생겨난 암세포의 등장인 것입니다. 환경적 요인도 결국에는 유전적인 요인을 통할 수밖에 없는 셈이지요.


그러나 유전적인 요인을 통하지 않고도 환경적인 요인만으로 생겨나는 질병이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는 혈액암의 경우, 혈액세포 안에는 아무런 유전적 변이가 발생하지 않지만 마치 변이가 발생한 암세포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개체는 혈액암과 아주 흡사한 질병 상태를 보이는데, 실제로 그 개체의 혈액세포들을 조사해보면 정상세포와 다를 바가 없는, 즉 유전자 변이가 전무한, 아주 재밌는 경우이지요.


좋은 토양보단 나쁜 토양에서 나쁜 씨가 생겨날 확률이 높다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도 나쁜 환경에 놓이게 될 때, 마치 자기가 나쁜 씨인양 행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 사례에서 저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함께 사회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먼저 정체성이란 개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정체성은 환경과 상관없이 본래 주어져 있거나 가지고 있던 어떤 것일까요? 아니면 환경적인 영향을 받아 바뀐 현재의 모습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어떤 것일까요? 환경과 독립적이라면 정체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고유한 특성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면 정체성은 바뀔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또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되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행위에 종속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유전적으로는 정상이지만 병리학적인 환경에 놓였을 때 마치 암세포처럼 구는 세포들을 떠올려봅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유전적으로 정의된 정상세포일까요? 행동으로 정의된 암세포일까요? 물론 후생유전학적인 측면도 다루고 여러가지 환경의 컨텍스트도 다뤄야 이 질문을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을테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해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묻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돌아가야 할 어떤 기준점이 없다면 반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이런 측면을 위에서 언급한 세포에 적용하자면, 유전적인 정체성이 그 세포가 돌아가야할 지점을 알려주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자신이 실은 정상세포라는 정체성을 상기함으로 인해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그러나 잘못된 행동으로 정체성을 규정해버리고 진짜 암세포처럼 그들을 처리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정상세포라고 해서 모든 세포가 클론처럼 행동하진 않거든요. 편차가 존재하지요. 보다 활발한 세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세포도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정상세포 중 암세포와 견줄만하게 활동적으로 행동하는 세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암세포 중에서도 마치 자기가 암세포라는 사실을 잊은 듯 잠복하며 정상세포보다도 덜 활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요. 즉 행동만으론 세포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게 됩니다. 정상적인 행동과 암적인 행동의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이지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암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행위에 따라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거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을 정체성을 가진 인격체로서 존중할 땐 상황이 달라집니다. 처벌로는 결코 그 사람의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측면에선 그 사람도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환경적인 요인을 배제한 체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만으로 그 사람을 단정짓고 마치 열등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배제하고 혐오하고 차별한다면, 우린 과연 암세포를 처리한 것일까요, 아니면 정상세포를 처리한 것일까요? 혹시 행위만으로 그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범죄자라는 정체성을 덧입혀 우리의 차별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진않을까요? 혹시 그는 아주 예민하고 성급하여 다른 씨보다도 먼저 발아한 정상씨였을 뿐, 실제 문제는 그런 발아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나쁜 토양은 아닐까요? 그리고 혹시 압니까? 조금만 더 강한 자극이 주어졌더라면 나도 발아했을지. 한가지 더, 그런 범죄가 사라지려면,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단하면 될까요, 아니면 나쁜 토양을 좋은 토양으로 만드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암세포처럼 행동한 정상세포에게 정체성을 상기하고 반성하라고 하기만 하면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 실험 결과를 알려드리지요. 어떤 정상세포도 제가 유도한 나쁜 환경에 가져다 놓았을 땐 모두 한결같이 암세포와 비슷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다시 좋게 만들어주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원래 정상세포처럼 굴었지요. 문제는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우리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자기가 정상이라 생각하는 우리들이 실은 나쁜 토양을 이루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상대적으로 튀는 소수자를 처단하면 전체는 다시 평화를 찾을 거라고 믿는 거지요.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볼 필요는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세포 하나가 어쩌면 변해가고 있는 나쁜 토양을 가장 먼저 알려준 지표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