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생명.
일상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순간. 몸은 움츠러들고 사기는 떨어진다. 머리는 냉소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온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금새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고독과 침묵을 통하여 정제된 자아를 만난다. 나도 모르게 손에 꽉 쥐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결국엔 별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미련하게도 난 그것들을 뒤늦게 내려놓는다. 덕분에 한층 더 가벼운 몸으로 다시 현실의 문을 열어젖혔지만, 망설이고 뜸들이는 동안 지나가버린 시간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완벽히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도 난 후회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와버린 것이다.
하루하루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그 믿음은 모래에 쌓은 성처럼 쉬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다음 번엔 정말 철저히 믿을만한 근거를 확보하고 천천히 한 번에 가자고 다짐을 한다. 그런데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다짐이 다짐으로만 끝나는 이 처참한 아침을 그 동안 난 얼마나 많이 맞이했던가.
하지만 일상은 살아있다고 난 믿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쉰다는 것은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일상은 생명이기 때문에 빈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빈틈이 없다고 느껴졌던 것은 그만큼 내가 쫓기는 삶을 살아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어떤 일을 하면 그 다음 일이 대기하고 있어, 난 현재라는 과거와 미래의 접점에 끼여 숨이 막혀 죽을 것처럼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일상을 살아내는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독과 침묵으로 새로이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젠 그 빈 공간들 사이로 직접 들어가 온 몸을 맡길 때다.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가진 새로운 시작은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서 운동력을 가지기 때문에 예리한 날을 가진 검처럼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찔러 쪼갠다. 책에서 읽고 깨달은 지식들에게,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얻은 지식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건 오로지 내 몫이다. 팔짱 끼고 앉아서 거만하게 지적질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비만은 지성과 영성에도 온다. 깨어있자. 움직이자. 그리고 살아있음을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