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동지.
어릴적엔 함께 뛰어노는 친구들이 동지였고, 학창시절엔 함께 공부하고 운동하며 땀흘리는 친구들이 동지였으며, 대학원생 시절부턴 함께 실험실 생활로 동고동락하던 친구들과 신앙생활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동지였다.
어른이 되고 하나 둘씩 각자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친구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눈에 띄게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나 역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마음으론 여전히 친구들을 동지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 자리에 인생의 동반자가 들어섬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동지들과의 끈은 얇아지거나 사라지거나 했다. 특히 미국에 오고나선 더욱 그랬다.
미국에서 포닥생활을 하면서도 의지할 곳은 가족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의 전부였다. 가뜩이나 잘 못하는 영어로 대화를 해야만 하고, 자라온 환경이 천차만별이라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공통된 무엇을 찾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그저 일에 관계된 것에서 철저하게 친절하고 철저하게 자연스러우면서도 사무적일 수밖에 없는 태도를 몸에 익힐 수밖에 없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 숨은 문화와 정서의 차이는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고해서 해결되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맞는 동지들과 함께 했던 기억은 점점 흐릿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갔고, 마침내 그것은 삶이라는 현실을 여는 문이 되어준 것만 같았다. 외로움은 어느덧 항상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일상의 경험으로 자리잡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위로를 받으려는 몸부림도 당당하게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쉽게 상처받는 등 예민해지는 것은 인간관계의 경험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타국에서 이런 취약성은 그 농도가 짙어진다. 외로움을 더 많이 더 잘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위로에 본능적으로 갈급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들을 대할 때의 자세가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 정도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미국에는 마음 속에서 생겨난 비장한 칼을 유머러스한 칼집에 넣어 표현하는, 미국만의 문화가 존재하고, 미국에 잡음없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없이 그런 자세에 익숙해지거나 적어도 모방하려고 노력을 해야한다. 물론 그래도 난 그런 미국적인 태도가 더 고급지다거나 상류층의 자세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버티다 버티다 난 몇 년전 몰락을 경험했고, 회복되어가는 과정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달라진 내게 의미가 있는 만남은 이론적인 지식으로 똘똘 뭉치거나, 경험 없이 나이브한 사고만으로 미래를 핑크빛으로 보거나, 자기자신의 역량과 배경에 의존하여 그것으로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는 위험천만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배제가 되었다. 한때 내게 우상이기도 했고 모델이기도 했던 그들이 더이상 내겐 울림을 주지 못했다.
내게 울림을 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특별나지 않다. 그저 일개 서민이다. 그들에게서 재미난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이다. 모두 책을 읽는 사람들이다. 책을 읽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의심하고 질문한다. 자신의 부족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봐 걱정을 할지언정, 그것을 가진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견제하며 밟을 기회를 찾지 않고, 서슴없이 나누려고 하고, 허물없이 서로 배우려고 한다.
비슷한 책을 읽어왔고 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똑같이 취미가 독서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동지라는 의미다. 페북을 통해 얻은 귀한 열매라고 한다면 이러한 동지들을 여러 명 만났다는 데에 있다. 동지는 함께 간다. 디테일에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큰 흐름의 축은 같다. 그래서 통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풍성함이다. 난 이들이 좋고 이들을 존경한다. 아, 얼마나 더 많은 동지를 앞으로 더 만날 수 있을까. 나도 부디 그들에게 좋은 동지로 여겨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