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나름 깨닫고 무지몽매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며 지적인 허영에 빠진 자칭 현실주의자에게
스스로 나름 깨닫고 무지몽매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며 지적인 허영에 빠진 자칭 현실주의자에게.
| 하루도 빠짐없이 냉소주의와 기쁨 사이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경험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냉소적인 이들은 어디를 가든 어둠을 찾습니다. 언제나 다가오는 위험, 순수하지 못한 동기, 은밀하게 진행되는 음모 따위를 지적하기 바쁩니다. 신뢰를 순진함으로, 배려를 허구로, 용서를 감상으로 매도합니다. 열심을 비웃고, 영적인 열정을 조롱하며, 성령의 역사를 멸시합니다. 스스로 무엇이 진실인지 실체를 볼 줄 알고 ‘도피적인 정서들’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과소평가할수록 그들의 어둠은 더 짙어만 갑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알게 된 이들은 어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캄캄한 가운데 반짝이는 빛이 어둠 그 자체보다 신뢰할 만하며, 한 줌의 광선으로도 엄청난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냉소주의와 기쁨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선택에 내몰립니다. 냉소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빈정대며 이야기할 수도 있고, 기쁨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쪽을 택할 수도 저쪽을 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을 택할수록 결국 더 큰 기쁨이 돌아오며, 하늘 아버집의 집에서 벌이는 참다운 잔치자리로 만들어주는 일들이 삶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 헨리 나우웬 저, ‘탕자의 귀향’에서 발췌.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며 빈정대기 좋아하는 이들에게선 나 역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선 누군가를 함께 까대면서 동질감을 느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기분까지 든다. 이 글을 읽고 찔리는 이들은 ‘기쁨’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고 우기며, 자신의 어두움을 애써 부인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비아냥대고 지적질해대면서 아는체하는 현실주의자들이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말들의 절반, 아니 십분의 일이라도 살아내고 있을지, 난 참 의문이다. 중요한 건 결국 살아내야 하는 것인데, 잠자고 있든 깨어있든 살아내지 못한다면 똑같지 않을까. 과연 그들의 빈정거림이 그들의 우월성을 나타내주는 것일까. 깨어남이 아니라 행함이 밝음이라면, 그들의 비아냥은 결국 또다른 모습의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오십보백보. 잠들어 있어도 깨어있어도 자기애에 가득찬 인간들의 부질없는 싸움에 과연 끝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