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떨기
호들갑 떨기.
미국 병원 소속 연구소와 대학에서 7년 넘게 일하며 체득한, 미국에서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생활의 팁 한 가지는 바로 ‘호들갑 떨기’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호기심이 생긴다면, 아마도 당신은 미국 생활을 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국 생활’이란 미국인들과의 접촉이 일상생활로 되어있는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 물리적으로는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여기 엘에이 근교에 살면서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제외하고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호들갑을 떤다는 말은 일단 어감부터 좋지 않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에게는 이 말이 결코 좋은 인상을 주진 않을 것이다. 경박하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가능한 멀리하며 살아야 할 덕목 중 하나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나도 모르게 깊숙이 뿌리박힌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7년 넘게 미국에 살면서 호들갑 떤다는 행위에 대해서 그 전보다 조금 익숙해졌고, 나도 그 호들갑의 흐름에 맞춰 종종 경박하게 굴기도 한다는 것이 예전과 달라진 유일한 점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러면서 미국인들의 정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고, 그에 따라 나도 조금은 더 미국인들에게 ‘외국인’이라는 표적을 지닌 이방인으로 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건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분이기 때문에 뭐라고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으나, 어쨌거나 그 덕분에 뭔가 조금 인정받는 듯한 묘한 느낌과 함께 왠지모를 자신감까지도 생겨서, 못하던 영어도 쪽팔림 없이 그들 사이에서 대담하게 해댈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타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나그네들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내가 하는 말을 머리를 거치지 않고도 피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호들갑 떨기가 사실 쉽지는 않다. 영어를 어느 정도 못하면 그들 대화 가운데 낄 수조차 없기 때문에, 뼈를 가진 유머를 겸비한 호들갑 떨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다분히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코드를 읽어내야만 비로소 경박하게 굴 자격이 생긴다고나 할까. 참 이상하고 웃긴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 미국에선 적당히 경박하고 적당히 까불 줄 아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넌지시 알리는 역할도 해내며, 한국인들의 캐릭터라고 알려진 ‘능력은 출중하나 소극적이고 사람들과 관계할 줄 모르는 성실하기만 한 일꾼’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인들에게는 충분히 경박하고 과장되게 보이는 그런 행동들이 알고보면 미국인들로 하여금 외국인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적대감을 해소할 수 있게 도와주고, 우리 외국인들에게는 일터에서 암묵적인 따돌림을 받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이 사실, 팁이 아니면 뭐겠는가. 사실 이런 호들갑 떨기를 잘 하지 못하면 미국인들은 당신이 영어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님), 만약 이런 걸 잘하면 그들은 당신의 실제 영어 실력보다 더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영어는 언어이고,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인들은 일하기 위해 영어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그랬다), 사실 그들과 관계하기 위해 영어를 하는 것이다. 여기 미국에 와서도 한 우물만 혼자서 계속 파면 언젠간 지도자급으로 승진할 수 있을 거라고 혹시라도 생각한다면, 난 단박에 꿈깨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한 우물 팔 수 있게 당신을 믿어주고 밀어주는 사람이나 환경도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소통하지 않는 독불장군은 여기 미국에선 한국보다 훨씬 더 혐오와 배제 대상이라는 사실도 말해주고 싶다. 어느 정도는 그들 정서와 문화에 맞출 줄 아는 능력도 필요하며, 그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거나 좋지 않게 볼 필요는 없다고 난 생각한다. 여기서 ‘차별’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어 반박한다면, 난 당신이야말로 타문화에 살면서 타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고 역으로 당신의 배제 의식을 짚어주고 싶다. 미국에서 한국 방식이 그대로 먹힐 거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그런데 호들갑 떨기는 단점도 가진다. 일터에서 그래도 가장 필요한 것은 일이 진행되게끔 하는 역량이다. 이건 아주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경험한 많은 미국인들은 이 역량 면에서는 많이 떨어지지만, 그 ‘호들갑 떨기’를 능수능란하게 잘해서 (처세술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쉽고 빠를지도) 실제적인 일의 성과보다 더 인정받는 경우를 많이 봤다. 사실 이런 기술을 의도적으로 믿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죽어나가는 불쌍한, 성실하기만 한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한국인들도 포함되리라) 생각해보면 참 서글프기도 하다.
Pro-active 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미국 직장에서는 말이다. Initiative 라는 말과 함께, 뭔가 능동적이고 알아서 먼저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해내는 사람을 더 가치있게 평가한다는 뜻일 것이다. 뚝심있게 잘 갈고 닦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는 ‘호들갑 떨기’는 어쩌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태도나 자세라고 이해하는 것이 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물론 정서적으로 많이 다른 우리 한국인들에겐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말이다.